[뉴스프리존] 대체로 포위 공격은 적의 병력보다 아군의 병력이 배 이상일 때 실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지어 손자는 “열 배면 포위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럴진대 적보다 적은 병력으로 포위하여 적을 섬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창조적인 행동이라 할 것이다.
칸나에 전투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이끄는 보병은 고의로 적에게 약점을 노출하여 유인한 다음, 기병으로 하여 우회적인 협공을 가하게 하여 훨씬 많은 로마 군대를 섬멸시켰다. 한니발은 이 과정에서 열세의 병력으로 우세한 적군을 포위 공격하여 섬멸시키는 탁월한 조직력과 지휘력을 보여주었다.
한니발(B.C. 247~B.C. 183)은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스 지역)의 장군이자 전략가였다. 그는 유명한 장수 하밀카르 바르카스의 아들로, 카르타고와 로마가 지중해 해상권을 놓고 다투던 전쟁 시기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면서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키웠다. 기원전 221년(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해), 한니발은 스페인에 주둔하고 있는 카르타고 군대의 최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기원전 218년, 그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스페인을 출발하여 만년설의 알프스 산을 넘어 이탈리아로 잠입함으로써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막을 올렸다.
기원전 216년 가을,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는 이탈리아 남부의 칸나에에 이르러 로마의 집정관 바로가 이끄는 군대와 마주쳤다. 쌍방은 여기서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그 규모가 가장 컸던 이른바 ‘칸나에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 전투에, 참가한 로마군은 보병 8만에 기병 6천이었고,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은 보병 4만에 기병 1만4천이었다. 전투에 앞서 로마군은 칸나에 부근의 평원에 진을 쳤다. 집정관 바로는 보병을 중앙에 밀집된 네모꼴로 배치하여 주력으로 삼고 기병을 양쪽 날개에 배치하여 엄호하게 함으로써, 보병의 맹렬한 공격으로 한니발의 군대를 일거에 무너뜨릴 작전을 세워두고 있었다. 한니발은 로마의 보병이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점과 이 지역이 정오가 되면 늘 동남풍이 강하게 분다는 기상 변화에 착안하여, 전 군대를 동남쪽을 등지게 한 다음 일부 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양옆과 뒷부분에 강력한 기병과 기동성이 뛰어난 경장비 보병을 배치하여 중앙이 凸 꼴로 불룩하게나온 반달 모양을 형성했다. 한니발은 정면을 견제하면서 양 날개 쪽에서 우회하여 협공하는 전술로 로마군을 섬멸하려 했다.
8월 2일 오전 9시경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바로는 보병에게 한니발 군의 중앙을 뚫고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니발의 중앙 보병은 싸우면서 후퇴하여 적을 깊숙이 유인했다. 바로는 이것이 계략인 줄 모르고 기세를 몰아 맹공을 가하여 한니발의 보병을 점차 凹 꼴로 몰아갔다. 말하자면 아가리가 큰 자루 모양이 형성된 것이다. 이때를 놓칠세라 한니발은 병사 5백 명을 로마군에 거짓 투항하게 했다. 바로는 이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주어 카르타고와 싸우게 했다. 나머지 보병들이 자꾸 후퇴하자 바로는 한니발 군이 이미 패색이 짙다고 판단, 마음 놓고 추격했다. 마침내 로마군은 한니발이 쳐놓은 자루 모양의 진에 완전히 빠지고 말았다.
적이 포위망에 완전히 빠진 것을 본 한니발은 즉시 양 측면의 기병에게 명령을 내려 로마 보병을 포위, 협공하게 했다. 로마 보병은 불의의 공격을 받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등 혼란에 빠졌다. 한니발은 즉시 날개 격인 기병에게 명령을 내려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게 하고, 좌측 기병에게는 우회하여 적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퇴로를 차단하도록 했다. 쌍방은 치열한 살상전을 전개했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동남풍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광풍은 흙과 모래를 동반하고 비정하리만치 로마군을 향해 덮쳤다.
흙과 모래 때문에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에서 로마군의 진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바로 그때 거짓으로 투항했던 5백 명의 한니발 병사들이 무기를 뽑아들고 닥치는 대로 로마 군을 공격하기 시작 했다. 사방에서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는 데다가 자기 진영의 심장부에서마저 공격을 당하고 보니 로마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체가 온 평원을 뒤덮었다. 12시간 동안 지속된 전투가 끝난 후, 로마 군 7만여 명이 사망하고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바로는 겨우 2백여 명과 함께 야밤을 틈타 탈출했다. 한니발 군은 6천여 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