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11일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서 30대 0선 이준석 후보의 선출은 한국정치사에서 역대급 이변이라 할 수 있다. 이준석 대표의 등장은 지금까지 정치사에서 원내경험이 없는 최연소일 뿐 아니라 외부지원 없이 자력으로 쟁취했기 때문이다.
이준석 등장에 가렸지만 최고위원에 조수진, 배현진, 정미경 등 3명의 여성을 포함, 젊은 세대가 대거포진, 국민의힘에만 한정한다면 완벽한 세대교체를 이룬셈이다. 이준석 현상으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에 그동안 3위 안에 들지못한 ‘젊은’ 박용진 후보가 정세균 전 총리를 제치고 급부상 하는 등 정치권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한국정치사에서 세대교체는 지난하지만 불가능한 화두였다.
1969년 11월 8일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은 서울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1971년 7대 대통령선거에 나설 신민당후보지명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김영삼은 “박정희 정권의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삼선개헌 강행 이후 오늘의 내외정세를 냉정히 분석하고 수많은 당내외 동지들의 의견들을 종합한 끝에 71년 선거에 신민당이 내세울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기로 했다”고 선언, 이른바 사십대기수론(四十代旗手論)을 들고 나왔다.
당시 김영삼 원내총무의 나이는 43세, 당시 유교적 가부장적 사회풍조, 일본식 계파정치가 강한 야당 신민당에선 파격적이고 돌출행동이었다. 당시 유진산 총재는 ‘40대기수론(40대후보론)’을 가리켜 “정치적 미성년(政治的 未成年)”이나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아직 젖 비린내가 난다’는 뜻으로 아직 어리다는 의미)”라며 견제하였으나, 박정희 정권에 타협적인 유진산의 행보에 실망한 국민정서를 업고 김대중(당시 46세), 이철승(당시 48세) 의원들이 속속 가세, 40대 기수론은 대세가 됐다.
한국사회에서 40대 기수론이 그나마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1960년 당시 최강국이던 미국에서 43세의 케네디 대통령이 등장한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 3선개헌까지 하면서 대통령을 하려던 박정희에 대한 반감, 이로인해 강력한 야당을 원한 국민정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7대 대선은 40대 기수들이 주도했다. 1차지명대회에선 당 조직을 업은 김영삼이 승리했으나 과반이 안되어 2차결선으로 갔지만 결선투표에서 김대중과 이철승이 연합, 극적으로 김대중 후보가 선출됐다. 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측의 부정선거로 김대중 후보는 90여만 표차로 낙선했고, 직선제에 자신없었던 박 정권은 이듬해 시월유신을 선포, 독재체제로 이행한다.
김영삼의 40대 기수론은 야당 뿐 아니라 정치권에 변화를 가져왔고, 기나긴 정치역정 속 김영삼은 1993년에, 김대중은 1998년 차례로 대권을 잡는다. 그러나 그 사이 새로운 40대 기수론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정치적 기득권이 되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출신지역을 기반으로 제왕적 권위주의로 정당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자생적 ‘기수’가 없는 정치권에서 그나마 젊은 정치인이 등장하는 것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크게 지거나 상황이 안좋을 때 ‘젊은 피’ 수혈을 통해 분위기를 바꾸고자 할 때 뿐이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소선구제로 바뀌어 경쟁이 극심해진다. 각 정당은 자신의 지역기반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불러모은다. 13대 총선의 최대 스타는 노무현 의원, 부산출신이라 김영삼에 발탁된 상고 출신 변호사는 88년 연말 이른바 ‘전두환 청문회’에서 예리하고 날카로운 질문으로 일약 청문회 스타로 발돋음해서 순탄한 의정생활이 약속됐지만 지역주의를 극복하다 몇차례 낙선했다. 그러나 이는 전화위복, 이로 인해 대중적 인기를 업고 2002년 대선에서 대권을 차지한다.
이후 각 정당들은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젊은 피’ 수혈이라는 이름으로 신진인사를 영입한다. 14대 총선에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재야 민주화 인사였던 이해찬 등을 영입했고, 1995년 지방선거 이후에는 지방단체장, 2000년 이후에는 이른바 486세대 등 정치권에 40대 기수들이 대거 등장한다. 2011년 지방선거에서는 당시 한나라당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김태호 경남지사 등을, 민주당에서는 송영길 인천시장, 이광재 강원지사, 안희정 충남지사 등을 배출, 차세대 주자들이란 기대감을 품게 했다. 국회에서도 김민석, 우상호, 임종석 등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포진, 젊은 정치의 기반을 넓혀 주었다.
그러나 10년도 안돼 신(新) 40대 기수들은 정치적 환경변화 속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내상을 입고 사라지거나 도태됐다. 지역에 기반한 강력한 제왕적 당 총재는 사라졌지만, 정당 시스템 속에 매몰돼 자신의 능력과 목소리를 전달할 기회를 잡지 못한 측면이 강하다.
최근 정치권에서 또다시 ‘40대 기수론’을 제창한 것은 전 미래통합당 총선 총괄선대위원장이었다. 김종인 전 위원장은 2020년 4월, 20대 총선에서 참패한 이후 언론과의 만남에서 산업화ㆍ민주화 세대의 그늘에 가려 있는 40대가 판을 깨고 개혁과 혁신을 주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구체적으로 “1970년대생 가운데 경제에 대해 철저하게 공부한 사람이 대선 후보로 나서는 게 좋다”며, 젊은 세대의 등장으로 당시 미통당의 침체국면을 돌파하려고 했다. 오랜 선거판을 치르고 나온 ‘동물적 감각’이 아닐 수 없다.
김종인 전 위원장의 예측보다 훨씬 더 젊은 30대 당대표가 출현, 정치권이 요동치고 있다.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누가 됐던 30대 이준석 대표와의 시너지 효과는 상당히 클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준석 효과에 유효하게 대처할 방식이 아직 안보인다는 점에서 더불어민주당의 고민도 깊어질 것 같다.
이준석 당대표가 쏘아올린 ‘세대교체’ 바람, 이미 등장만으로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이준석 등장으로 민주당 박용진 후보의 급부상 등 세대교체 바람이 거세질 전망이다.
대한민국 시계가 빨라지고 있다. 대선판은 이제 9개월도 안남았다. 대선에서 마지막에 웃을 자는 누구인가? 관전 포인트가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