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민과 인재등용의 공정성으로 사덕(私德)과 공덕(公德)을 펼쳤다.
기나긴 중국 역사에서 지금까지 쇠털처럼 많은, 관리들이 명멸했지만 약간의 흔적이라도 역사에 남긴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특히 명재상의 반열에 오른 이는 봉황의 깃털이나 기린의 뿔처럼 희귀하다.
그러나 중국의 역대 명재상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강직함이다. 강직한 성격이야말로 명재상이 되어 후대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송나라 초기의 여몽정이 그런 명재상이었다.
여몽정(呂蒙正-944~1041)은 자가 성공(聖功)이며 하남 사람이다.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977) 과거에 장원급제한 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거쳐 조보(趙普)와 함께 송나라 초기의 재상이 되었다. 송나라의 개국공신이자 원로 대신인 조보는 여몽정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는 한때 이부상서(吏部尙書)로 강등되기도 했지만, 나중에 다시 재상직을 되찾았다. 물자를 아낄 것을 주장하며 나라 안을 다스리는 데 힘쓰고 이웃 국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나중에 하남부(河南府)로 전출되었다가 진종(眞宗)이 즉위하자 또, 한번 재상이 되었다. 송나라 건국 이래로, 세 번이나 재상이 된 인물은 조보와 여몽정 두 사람뿐 이었다.
개보(開寶) 9년(976),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갑자기 숨을 거두자 이 틈을 타 태조의 동생 조광의(趙光義)가 태감 왕승은(王承恩)의 도움과 일명 ‘금궤(金匱)의 동맹’이라는 여론의 지지에 힘입어 태종으로 즉위했다. 태종의 즉위는 전통적인 부자승계의 원칙을 어겼기 때문에 적지 않은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태종은 민심을 구슬리고 새로운 지지 세력을 얻기 위해 대대적으로 과거를 시행해 인재를 끌어모았다. 태평흥국 2년, 태종은 첫 과거에서 5백 명의 급제자를 뽑았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엄청난 숫자였다. 여몽정은 바로 이 과거에서 급제했다.
자신의 특수한 처지로 인해 태종은 이때 뽑힌 관리들을, 특별히 중용했다. 여몽정은 장원급제자의 신분으로 감승(監丞)이 된 뒤, 곧 승주의 통판(通判)으로 승진했고 무려 20만 냥의 상금을 받았다. 이때 그는 백성의 어려운 사정을 보면 역참(驛站)을 통해 곧바로 황제에게 보고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오래지 않아 그는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이 정도로 은덕을 입었으면 되도록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지만 여몽정은 늘 태종의 심사를 불편하게 했다.
다음의 태종과 여몽정의 대화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유명하다. 어느 해 정월 대보름날, 태종은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대단히 기분이 좋아 보였고 여몽정 등이 자리를 함께했다. 태종은 자신이 황제로서 모든 일을 잘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하들이 추켜올려주기도 전에 먼저 자신의 공적을 떠들어댔다.
“오대 시절 민생이 파탄에 이르렀을 때, 태조께서 업진에서 군사를 일으키셨네, 당시 땅에서는 화재가 빈번했고 하늘에서는 혜성이 나타났지. 사람들은 저마다 공포에 질려 다시는 태평성대가 오지 않으리라 입을 모았다네. 그런데 짐이 직접 정사를 돌보면서부터 만사가 다 순조로워졌지 않은가. 짐은 그 모든 것이 다 하늘이 내린 복이라고 생각했네. 하지만 오늘날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살기 좋아져서야 알게 되었네. 나라의 평안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고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걸 말이야.”
태종의 이 말은 당시의 상황에서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로서 그렇게 경솔하게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태종은 신하들이 맞장구를 쳐주길 바랐지만 모두들 불편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 난처한 분위기에서 여몽정이 일어나 말했다.
“폐하께서 계신 이 도읍은 많은, 인재들과 물자가 집중된 곳입니다. 당연히 번화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도읍 밖으로 몇 리만 나가보십시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백성들이 허다합니다. 많은, 백성들이 제대로 배를 불리지도, 몸을 녹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천하는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태평성대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부디 눈길을 먼 곳까지 두십시오. 교만함과 조급함을 경계하시고 힘써 정치를 도모하신다면 그것이 곧 천하 백성들의 복입니다.”
재미가 싹 가신 태종은 단박에 표정이 일그러져 입을 다물었고, 여몽정은 엄숙한 기색으로 자리에 앉았다. 나중에 신하들은 모두 그가 용감하게 바른, 말을 했다고 칭찬했다.
또 한번은 태종이 북방에 사신을 파견할 일이 있어 재상에게 재능 있는 인물을 물색하라고 지시했다. 여몽정이 한 사람을 추천했으나, 태종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반대했다. 며칠이 지나자 태종은 다시 여몽정에게 사신 문제를 거론했다. 하지만 여몽정은 다시 그 사람을 추천했다. 태종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조정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하필 그자만 추천하는 것일까? 일부러 날 골리려는 수작이 아닌가?’
태종이 화난 목소리로 그를 다그쳤다.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가?”
“고집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저의 충정을 헤아리지 못하시는군요. 이 사람은 사신이 될만한 능력이 충분합니다. 아무도 이 사람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저는 폐하께 영합하여 나라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황제와 신하는 둘 다 흥분한 상태였다.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은 감히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결국, 태종은 여몽정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가 추천한 사람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나중에 여몽정의 생각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사신은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여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여몽정은 성격도 관대하고 후덕했다. 장원급제하여 태종에게 중용된 후 승주의 통판에서 중서시랑 겸 호부상서, 감수국사(監修國史) 등을 거쳐 재상이 되기까지 겨우 1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 42세였다. 다른 신하들이 그를 질투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여몽정이 막 조정에 발을 디뎠을 때 한 대신이 그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이런 어린애도 정사에 참여한단 말인가?”
그것은 그에게 커다란 모욕이었다. 당시 그가 갖고 있던 권력을 행사한다면 충분히 응징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여몽정은 못 들은 것처럼 그 사람 앞을 쑥 지나쳤다. 그를 존경하던 동료 하나가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려 했다. 여몽정이 급히 그를 만류하며 말했다.
“그의 이름을 알아내면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것 같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지.”
그는 다른 사람의 악의 어린 비방과 모함에 대해서도 태연하게 처신했다. 채주의 지주(知州)인 장신(張紳)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횡령을 했다는 여몽정의 상소로 관직을 박탈당했다. 누군가 태종에게 말했다.
“장신은 집안이 부유합니다. 절대로 횡령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여몽정이 사사로이 장신에게 보복한 한 겁니다. 여몽정이 가난할 때 장신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거절당한 일로 원한을 품은 겁니다. 지금 여몽정이 재상이 되자 복수를 하려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듣고 태종은 좋은 사람이 누명을 썼는가 싶어 조사도 하지 않고 장신을 복직시켰다. 그러나 여몽정은 태종에게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사실이 밝혀지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순화(淳化) 2년(991), 여몽정이 감히 직언을 올렸다가 재상직에서 물러났을 때였다. 감찰원에서 새로 관리들을 감찰하다가 장신의 횡령 증거를 발견했고, 태종은 즉시 장신을 강주의 부사(副使)로 강등시켰다. 순화 4년(993), 여몽정은 다시 재상에 복직했다. 오래전에 여몽정을 오해했던 태종이 그에게 말했다.
“장신이 과연 횡령죄를 저질렀더군, 그래.”
태종은 여몽정이 분명 과거의 억울함을 고하고 황제의 현명함을 찬양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몽정은 변명도, 칭송도 하지 않고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여몽정은 어렵고 파란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연극으로 만들어져 널리 전파되기도 한 그의 이야기는 여몽정의 부친이 여러 명의 첩을 두어 본처 유씨와 사이가 벌어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결국, 유씨는 아들 여몽정과 함께 여씨 집안에서 쫓겨난다. 여씨 집안을 나온 후 유씨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어렵게 생활하며 아들과 서로 의지하여 살아간다. 나중에 여몽정이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의 길에 들어서자 가정형편은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그런데 그는 부친의 지난날의 소행을 따지지 않고, 같은 집에 방을 따로 두어 부모를 모셨다. 그리고 세심하게 부모를 봉양하여 새로이 한 가족이 될 수 있었다. 이 점에 대해, 그때나 지금이나 그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여몽정은 또 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그는 사실,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를 찾아와 청탁을, 하곤 했다. 이런 사람들을 여몽정은 교묘하게 따돌리곤 했다. 한번은 조정의 어떤 사람이 그에게 옛날 거울을 선물했다. 그 사람은 사방 2백 리 안의 물건을 다 비추는 거울이라면서 받아 주기를 청했다. 여몽정이 웃으며 말했다.
“내 얼굴이야 겨우 쟁반만 한데 2백 리를 비추는 거울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는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승진을 부탁하려던 그 사람을 물리쳤다.
여몽정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으며 인재를 쓰는 데 있어서 ‘바깥에서 사람을 구하면 원수도 피하지 않고, 안에서 사람을 구하면 친한 사람도 피하지 않는다’라는 옛 선인의 기풍을 따랐다. 그는 인재를 가리고 추천할 때 자신과 사이가 가깝고 먼 것을 따지지 않았다.
경덕(景德) 2년(1005), 여몽정은 노환을 이유로 낙양에 내려가 한가한 생활을 누렸다. 나중에 진종이 태산에 제사를 지내러 가던 길에 그의 집을 방문했다. 인재를 찾고자 했던 진종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아들들 가운데 중책을 맡을 만한 이가 있소?”
“제 아들들은 다 변변치 않습니다. 지금 영주에 있는 조카 여이간(呂夷簡)이 재상의 재목이니 크게 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진종은 여이간이란 이름을 단단히 기억해두었다. 과연 여이간은 훗날 유명한 재상이 되었다.
여몽정과 교분을 나누던 이 중에 부언(富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여몽정의 학식을 존경했던 부언은 자기 아들을 그에게 보이고 싶어 했다.
“제 아들이 벌써 십여 세인지라 서원에 넣어 공부를 시키고 싶습니다.”
여몽정은 쾌히 승낙하고 아들을 데려와 보라고 했다. 그는 부언의 아들을 보자마자 놀라워하며 말했다.
“이 애는 장래 높은 자리에 오를 거요. 공적 또한 저를 훨씬 능가할 겁니다.”
그래서 여몽정은 부언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공부시켰다. 그 아이의 이름은 부필(富弼)이었다. 부필은 훗날 두 차례 재상의 자리에 올랐고 역시 송나라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다.
중국 역사의 다른 재상들과 비교하여 여몽정은 그리 탁월한 공적은 남기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사회 환경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명재상도 그의, 강직하고 후덕한 품격만큼은 따라가지 못했다. 여몽정은 바로 그러한 품격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여몽정은 내국공(萊國公)에 봉해졌으며 68세의 천수를 누렸다. 사후에는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실 여몽정은 좋은 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가 살았던 송 시대는 ‘사대부는 죽이지 않는다’ 는 지극히 선비를 존중하던 시대였다. 만약 그가 다른 시대에 살았다면 아마도 진작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우리는 중국 역사에서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실제로는 현명했던 인재를 더 찾아볼 수 있다. 홍매(洪邁)는 자신의 『용재수필 容齋隨筆』에서 무위의 정치를 펼쳤던 일곱 명의 재상들을 열거했는데 조참(曺參), 왕도(王導), 사안(謝安),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조보(趙普), 이항(李沆)이 그들이다.
한나라 초기의 조참은 소하의 뒤를 이어 혜제(惠帝) 때 재상을 지냈다. 그는 도교의 가르침을 계속 시행하여 백성들의 편안함을 추구했다. 정치와 경제 정책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조참은 소하가 시행했던 조치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본인은 늘 술에 절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하들이 술을 마셔도 상관하지 않았고, 혹 일을 하다 작은 잘못을 저질러도 너그러이 덮어주었다. 부하들은 그의 덕에 감격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조정의 대신들은 자주 불만을 느꼈다. 결국, 대신하나가 혜제에게 조참의 소행을 고해바쳤다. 혜제가 그를 불러 사실을 묻자 그는 바닥에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면서 혜제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자신의 현명함과 용맹함이 돌아가신 고조 폐하보다 앞선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어찌 선제(先帝)와 비교가 되겠는가?”
조참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저의 제주가 전임 승상인 소하 보다 낫습니까, 못합니까?”
혜제는 그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소 승상보다는 못하겠지.”
“조참은 그제야 본심을 털어놓았다.
”폐하의 말씀이 확실히 맞습니다. 옛날 고조 폐하와 소하는 천하를 평정하고 법령과 제도를 다 완비했습니다. 오늘날 폐하께서 정사를 처리하시고 신하들이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모두 전대의 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설마 전대를 계승하는 것 말고 더 나은 방책이 있단 말입니까?“
혜제는 말을 다 듣고 나서야 조참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했다.
”승상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네. 돌아가 쉬도록 하게.“
조참은 병으로 죽기까지 꼬박 3년 동안 재상을 지냈다. 그 기간에 한나라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는 본래 도교에 심취했던 인물로서 무위의 정치를 주장했다. 이를 이해하려면 한나라 초기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오랜 전란 끝에 세워진 한나라는 무엇보다도 휴식이 필요했다. 이런 까닭에 소하는 무위의 정치를 도모했고, 이어서 조참이 이를 따른 것이다. 따라서 모든 공을 조참에게 돌리는 것은 무리이다. 실제로는 유방과 소하의 밝은 지혜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동진의 왕도(276~339) 역시 매우 똑똑한 인물이었다. 그의 성격은 당시의 명사들과 다소 비슷했다. 그는 원제(元帝), 명제(明帝), 성제(成帝) 세 황제를 연이어 섬기면서 청정(淸靜)과 무위의 정치를 실천했다. 동진 시대에는 줄곧 어리석음을 선호하는 기풍이, 성행했다. ‘관리를 지내면서도 관아의 일을 하지 않고 일을 하면서도 일할 마음이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왕도는 동진의 구체적인 현실에 근거하여 이러한 책략을 구사했다. 물론 이 책략이 모든 사건과 장소에서 다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떨 때는 대단히 뛰어난 효력을 발휘했다. 당연히 이것은 특별히 훌륭한 책략은 아니었지만, 왕도처럼 지혜로운 이가 아니고서는 활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을 일컬어 한 사람의 마음에 운용의 묘가 있다고 한다. 만년에 그는 더욱 너무 많은 일을 처리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오해할 때에는 이렇게 설명하곤 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이 없다고들 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분명히 내 게으름이 나라의 안녕을 가져왔다고 생각할 걸세.“
동진의 또 다른 재상 사안도 대단한 도량과 식견의 소유자였다. 그는 어떤 일이라도 몸소 처리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뜻이 원대하고 성격이 화통했던 그는 여유롭고 즐겁게 나라 안의 일들을 잘 처리했다.
당나라의 재상 방현령과 두여회는 당 태종을 도와 나라를 안정시킴으로써 ‘정관의 치세’를 이룩했다. 하지만 그들의 공적에 관한 역사 기록은 그들이 실제로 이룬 것보다 훨씬 빈약하다. 그들은 비록 이전의 제도를 대폭 개혁하긴 했지만 언제나 인위적인 것을 지양하고 자연스러움을 중시했다.
송나라 초기의 조보는 송 태조의 재상이었다. 그는 민심을 수렴하고 관리들을 단합시키는 데 힘썼다. 특히 관리들의 과실을 신중하게 다뤘는데, 심지어 처리하지 말고 관용적인 태도로 순리대로 놔둘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사대부들이 서로 헐뜯고 고발하는 문서가 들어오면, 눈길 한번 안 주고 준비해둔 두 개의 큰 독 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나중에 독이 꽉 차면 한꺼번에 불살라 버렸다. 이것은 관리들 사이의 암투와 국가에 대한 위협을 막기 위한 행동이었다. 어떻게 보면 책임을 회피한 것처럼 비치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안정을 이룩하고 단결하는데 적극적인 기여를 했다.
송나라 시대의 이항도 우둔한 것 같지만 지극히 현명했던 재상이다. 그는 각종 건의가 올라올 때마다 매번 비준을 거부하고 조상 대대로 전해져온 법을 바꾸지 말 것을 주장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이 방법으로 나라를 섬길 거요. 그러면 족한 것 아니겠소?“
홍매가 꼽은 일곱 명의 재상들은 비록 고관으로서 생살여탈의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태종에게 영합한 적도, 또한 자신들의 명성을 과시한 적도 없었다. 그들은 진정 현명한 재상이었다. 당연히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이 건성으로 일한 재상이었다고 비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