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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월미도 실향민, 고향을 찾기 위한 70년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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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월미도 실향민, 고향을 찾기 위한 70년의 여정…국방부는 왜 외면하나?

최도범 기자 ing-news@hanmail.net 입력 2021/06/28 17:33 수정 2021.06.28 18:05
"국방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권고 충실히 이행해야"
월미공원에 있는 ‘월미도연표’. / ⓒ 최도범
월미공원에 있는 ‘월미도연표’. / ⓒ 최도범

[인천=뉴스프리존] 최도범 기자 = 월미도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원주민들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실향한지 72년이 된 지금, 아직까지 이들은 실향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실향민들의 귀향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이들의 상처에 정부는 소금을 뿌리는 갑(甲)질을 하고 있다.

정부의 한 부처인 국방부는 지난 2019년 월미도 피해주민에 대해 적극적인 민원 해결 약속과 함께 이듬해인 2020년에는 월미도 주민들의 귀향을 위해 국방부와 행안부 그리고 인천시, 피해주민이 참여하는 4자 협의체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공문을 보낸바 있다.

하지만 돌연 국방부는 공문의 잉크가 미처 마르기도 전에 월미도 원주민에 대한 입장을 180도 바꾸어 월미도 주민에 대한 귀향의 책임이 없다며 인사이동으로 새로 부임한 사무관을 통해 일방정인 통보의 수순을 밟았다.

이때 국방부가 책임을 면하고자 제시한 내용은 2013년 고등법원에서 국가가 해당토지를 국유지로써 매각한 사실이 월미도 원주민의 토지 소유권과 귀향할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다는 판결을 그 근거로 삼았다.

국방부는 이 해당 토지가 자신들이 보존등기함으로 국유지가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주민들의 주장에 대해 이해를 하고 4자 협의를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에서 고법 판결을 근거로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후 해당 담당자는 월미도 민원인의 전화를 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장관이나 부서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원칙과 일관성 없는 행정을 펼치는 국방부를 보며 멀어져 가는 귀향의 시름은 깊어만 가고 있다.

월미도 원주민의 귀향 요구의 배경

인천상륙작전으로 고향에서 쫓겨난 월미도 원주민에 대해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 위원회)는 이들의 피해를 인정하고 위령비 건립과 정부․미군과의 협상권, 원주민의 귀향 지원 등을 정부와 지자체에 권고했다.

월미도 원주민의 피해를 조사한 과거사 위원회는 과거사 진상규명을 목적으로 지난 2005년 5월 제정된 ‘과거사법(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으로 한시적 활동을 마쳤고 피해생존자와 유족들의 간절한 열망으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개정됨에 따라 지난 2020년 12월10일 2기가 재출범한 상태다.

하지만 지난 2008년 과거사 정리위가 권고한 결론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정부는 어떤 움직임도 하지 않고 있어 이번 2기 출범에 대해 이번 정부의 정치적 제스츄어로 끝나지 않을지 의문이 발생한다.

현재 인천시는 원주민들의 끝없는 노력으로 지난 2021년부터 위령비 건립과 피해 주민에 대한 생활안정지원금 지급을 위한 조례 제정 등 가시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인천시의 이러한 움직임은 과거사 정리위의 권고에 대해 박남춘 인천시장의 강한 의지와 지역 시의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추진돼 지난해 하반기부터 생활안정지원금이 집행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국방부의 문제 인식에 대한 공문과 행안부의 피해에 대한 인지 정황을 들어 인천시가 시 조례를 추진했으나 한때 국가사무와 지방 사무의 개념에서 혼선을 빚던 중 최종 행안부가 지방 사무로 인정하며 시 조례가 만들어지게 됐다. 하지만 이들 원주민의 가장 큰 고민은 향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귀향의 난제들

인천상륙작전으로 고향을 떠나온 이들에게 고향땅은 이미 미군이 토지를 강제 징발해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인천시는 미군이 떠나가면 귀향하도록 돕겠다는 말로 이들을 위로했다.

하지만 이들 고향땅은 미군이 떠나가던 1970년에 국방부가 토지를 미군으로부터 반환 받아 해군이 이를 기지로 사용했고 지난 2010년 인천시에 매각해 지금은 월미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군사 정부의 서슬퍼런 압력과 군대의 주둔이라는 명분은 귀향을 요구하는 민원이 묵살되기에 충분했으며 해당 토지를 국방부가 국유지로 보존등기해 인천시에 매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이 문제는 2008년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월미도주민의 피해가 사실로 드러나고 정부의 책임이 있다는 결과가 나오며 월미도 주민들의 한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하지만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고향을 돌려주지는 못했다.

현재 땅을 매각한 국방부는 매각 당시에 계약서에 명시된 책임이 인천시에 있다는 이유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으며 인천시는 반대로 국방부에 책임이 있다는 핑퐁 과정에서 지난 2019년 인천시 월미도 원주민의 생활안정지원조례가 만들어졌다.

이 조례는 폭격으로 희생된 주민들의 가족들과 고향을 떠나야 했던 주민들을 대상으로 생활 안정을 지원하는 것으로 귀향의 법적 근거가 과거사위원회에 의해 만들어 졌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의 물살도 잠시, 국방부의 재산관련 부서의 담당자 인사 이동 이후 그동안 주민들의 피해 사실을 인정하며 귀향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는 국방장관의 답변과는 달리 해당 부서는 입장을 180도 바꿨다.

주민들이 귀향하겠다는 토지가 당시에 국유지로 국방부는 인천시에 매각한 행위가 정당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인덕씨는 국민신문고를 통해 국방장관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을 이행해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답변은 담당자와 연결하라는 것이지만 해당 부서의 사무관은 민원인과의 통화를 회피하고 있어 실제 소통의 길이 막힌 상태이다.

민원을 제기한 한인덕 위원장은 “우리들의 아픈 사연을 장관님을 만나 하소연하고자 했다”며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전화를 받지 않는 담당자 전화번호만 적어 놓고 형식적인 답변만을 했다”라고 울분을 토했다.

한 위원장은 이어 “전쟁으로 인한 인적 피해는 전쟁의 승리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고 하지만 개인의 재산을 파렴치하게 빼앗아 팔아먹는 정부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며 “일제에도 우리들을 살던 땅에서 강제 이주를 시킬 지언정 최소한 대체지를 마련해 주었건만 어떻게 우리 정부가 국민의 재산을 강탈해 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인천상륙작전기념 승전 행사 전시사진. / ⓒ 최도범
인천상륙작전기념 승전 행사 전시사진. / ⓒ 최도범

국방부, “문제의 토지는 국유지” 주장

현재 민원인들이 주장하는 토지는 국방부의 주장대로 등기부상에 국유지로 등재돼 있는 것이 맞다. 하지만 해당 토지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일제에서 조사한 토지조사보에는 소유권에 대한 등재가 없으며 오히려 매일신보와 인천부사 등의 자료에 따르면 원주민들이 살던 어촌마을에서 일제에 의해 3차에 걸쳐 강제 이주를 당해 문제의 토지에 정착했다는 사실만이 나오고 있다.

국방부가 주장하는 국유지 등재는 1971년 미군이 해당 부지를 국방부로 이관하며 국방부가 해당 토지에 권리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국가 명의로 보존등기를 신청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이미 민원을 제기해 인천시로부터 해당 부지에 미군이 나갈시 귀향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는 인천시의 약속은 철저하게 묵살된 것이다.

특히, 해당 지역의 만석동장이 민원인들에 대해 주거 사실을 인정한 문서 등을 볼 때 국방부의 보존등기 행위는 국민을 상대로 한 일방적인 소유권 강제 취득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증거로 부각되는 ‘보존 등기’는 미군이 철수하고 나서 해군이 들어서는 과정에 불명예재산에 대한 토지에 대해 해군과 국방부 간에 오고간 공문에서 드러난다.

‘보존등기’라는 용어는 법률상 미등기부동산에 대해 부동산소유권의 보존을 위한 등기로 부동산의 권리변동 기초가 되며 권리변동은 모두 이 보존등기를 기초로 행해진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국유지가 아니라 소유권이 불분명한 땅에 대해 국방부는 소유권자를 찾지 않고 보존등기를 국유지로 등재해 인천시에 매각했다는 것이다.

왜? 이 토지는 미등기부동산(불명예 재산)이었나?

문제의 월미도 주민들은 조선시대로부터 어촌 마을로 살아왔다. 인천부사에 따르면 대한제국에 대해 일제의 압박이 커져가던 당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1905년 군사기지를 만든다는 이유로 일부 주민들을 북성동 77~82번지로 1차 강제 이주시켰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이후 1918년 일제는 어촌인 부락과 더불어 10만평 대지에 월미도 공원을 조성하고자 남은 주민들을 1차 강제 이주지에서 북성동 88~90번지로 2차 강제 이주 시킨 것으로 매일신보는 기사화 하고 있다.

이후 일제는 북성동 77~82번지에 1차로 강제 이주시킨 주민들을 석재를 채굴한다는 이유로 1942년 4월경 북성동 88~90번지로 3차 강제 이주시키기에 이른다.

이때 일제는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며 토지 소유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지 않은 채 방치함으로 원주민들은 이 토지에 대해 실제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된 것.

이후 해방되며 정부는 일제의 적산 가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1949년 12월 '귀속재산처리법'이 제정·공포했다.

이에 따라 부동산 재산은 국·공유로 지정되는 중요한 몇몇 재산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간인에게 불하하게 되었으나 1950년 6월말 불하 신청 마감일 이전에 6.25 전쟁이 터지며 행정이 지연되게 됐다.

귀속재산 처리법은 전쟁 기간을 거쳐 1958년 5월말을 기점으로 총 26만 3774건으로 90%의 실적을 올리며 완료됐다. 하지만 월미도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이 주둔하며 귀속재산처리법의 대상에서 제외됐고 미군 철수의 시간을 기다리게 됨에 따라 국방부가 보존등기를 국유지로 신청하는 시기까지 미등기 상태로 남아있게 있어 인천에서 매입하는 오늘의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국방부는 월미도 원주민이 주장하는 토지를 인천시에 매각한 원인 행위자로 문제 해결의 키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행안부는 행정 관리에 있어 법적 지위와 조정의 주체로 국방부의 행위에 대해 실제 관리가 가능한 부서이기에 협의에 있어 중요한 부서로 부각된다,

아울러 인천시는 현재 토지의 소유주로 국방부를 통해 토지를 매입했으나 실제 토지에 대해 민원이 있는 사실을 알고도 비밀리에 국방부와 매입 계약을 치뤘다는 점에서 민원인에 대해 책임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책위가 수십년간 국방부와 인천시 등을 찾아다니며 민원을 제기했으나 지금까지 서로 책임만을 전가할 뿐 실제 해결의 단초를 찾는 노력에는 미흡해 왔다.

토지 매각에 대한 권리 문제와 매입에 앞서 사고 토지라는 점을 인식하고도 매입에 나선점, 그리고 이들 전체에 대해 법적 권리에 잣대를 들이대야하는 부서, 문제의 피해자들이 모여 서로의 입장을 밝히고 풀어 간다면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 주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특히, 월미도에 대한 문제는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권고한 사항에 대해 집행 절차만 남은 것으로 특별법이나 행정 소송 등의 2차 절차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요즘 코로나 19로 인해 정부의 정책으로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에 대해 정부는 책임있는 모습으로 피해 보상을 거론하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라의 존폐가 달린 군사작전으로 인해 지난 72년간 모든 것을 잃은 국민에게 하루 빨리 생활의 터전을 되찾아주는 정부의 순기능이 필요한 시기이다.

또한 국민의 아픔에 대해 내 아픔처럼 여기고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공무원의 모습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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