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현종의 후궁. 양귀비는 이름이 아니라 양(楊)씨 성에 귀비(貴妃)라는 직함이 붙은 것이다. 그러니까 귀비 양씨의 본명은 ‘양옥환(楊玉環)’이다.
본관은 포주(蒲州) 영락(永樂)이며 용주(容州)에서 출생했다. 17살에 현종의 제18황자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가 되었다.
그러나 현종이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어 물색하던 중, 수왕비의 아름다움을 진언하는 자가 있어 황제가 온천궁(溫泉宮)에 행행(行幸)한 기회에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수왕의 저택을 나와 태진(太眞)이란 이름의 여도사(女道士)가 되어 세인의 눈을 피하면서 차차 황제와 결합하였다.
당시 현종은 56세. 양귀비는 22세로 둘의 나이 차는 무려 34살 차이이나, 27살 때 정식으로 귀비(貴妃)로 책립되었다. 이게 막장인지 아닌지는 논외로 하고, 왜냐면 수왕의 생모가 무혜비이기 때문이다. 즉, 원래 총비였던, 시어머니가 죽자 며느리가 그 자리를 계승한 꼴이다. 참고로 전남편 수왕 이모는 천보 4년(745년)경에, 위소훈(韋昭訓)의 셋째 딸인 위(韋)씨를 새 왕비로 맞이하였고 전처인 양씨와의 사이에서는 두지 못했던 자녀를, 후처인 그녀나 다른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많이 두게 된다.
수년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 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 괵국(虢國, 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양귀비는 물론 자매와 친족에게까지 현종이 후대하니, 이런 상황을 백거이가 쓴 장한가에 묘사했다.
後宮佳麗三千人 - 후궁에 3천 미녀가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 3천 명분 총애가 한 사람에게 내리네
遂令天下父母心 - 비로소 천하의 부모들이
不重生男重生女 - 아들보다 딸 낳기를 중히 여기네
양귀비 자매가 누린 부귀영화로 친척 오빠인 양국충(楊國忠) 이하 많은 친척이 고관대작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하였다. 양귀비가 남방(南方) 특산의 여지(荔枝)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당시 양귀비의 옷을 만드는 전문인력만 700명이 넘었다고 하니, 나라가 기울지 않을 리가 없다.
755년 양국충과의 반목이 원인이 되어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 귀비 등과 더불어 쓰촨(四川)으로 도주하던 중 장안(長安)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게 불만이 폭발한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양귀비에게도 죽음을 강요했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양귀비는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양귀비는 중국의 4대 미인(美人) 또는 5대 미인 중 한 명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 언급되곤 한다. 정사(正史)에선 양귀비를 ‘자질풍염(資質豐艶)’이라 표현했는데, 체구가 둥글고 풍만한 느낌의 미인이란 뜻이다. 즉 지방이 별로 없는 슬림한 체형이 미의 기준인 현대의 미인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타입. 양귀비 이전에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인 매비가 양귀비를 일컬어 비비(肥婢-살찐 종년)라 욕했다는 일화도 있다.
옛날 벽화나 그림을 보면 미인은 통통하거나 육덕지게 살집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왜냐하면 당시는 음식이 귀해서 살이 찔 수 있는 사람들은 대개 신분이 높았기 때문에 통통할수록, 미인으로 보았다. 특히 당나라는 당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주해 살던, 지금으로 치면 미국 같은 다문화 국가였기 때문에, 유럽이나 중동의 영향을 받아 육덕 체형의 미인이 인기가 있었다.
양귀비는 가무(歌舞)에도 뛰어나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양귀비의 별명인 해어화(解語花)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말을 알아듣는 꽃, 얼굴만 예쁜 꽃 같은 후궁이 아니라 지적인 여자라는 의미로, 동시대의 이백(李白)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白居易)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曲)으로 하여 [장한가(長恨歌)]를 노래하여 양귀비는 중국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여주인공이 되었다. 진홍(陳鴻)의 [장한가전(長恨歌傳)]과 악사(樂史)의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이후 윤색은 더욱 보태져서 후세의 희곡에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양귀비 자신은 정치나 권력투쟁에는 관심이 없이 현종과 음악을 즐기며 지내는 생활에 만족한 편이었다.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오빠 양국충의 정치적 라이벌인, 안록산이 장안을 방문했을 때, 살이 쪄서 뱃살이 무릎에 닿을 정도인 그의 외모를 재미있게 여겨 홀딱 벗겨 목욕시켜 아기 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돌아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현종도 그걸 보고 웃으면서 아기 씻긴 값을 주었다고 한다. 훗날 안록산이 간신 약국충 토벌을 명목으로 난을 일으키고 양귀비가 자살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생각하면, 중국에서는 이때 양귀비와 안록산이 사랑에 빠져 안록산이 양귀비와 다시 한번 만나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내용의 희곡도 있지만,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워낙 인기인이라 양귀비, 양귀비 비사, 대당부용원 등 양귀비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여러 편 만들어졌다.
야사지만 양귀비는 겨드랑이 냄새(암내)가 심했다고 한다. 곁에 있던 시종이 솜으로 코를 막고 다닐 정도라 양귀비는 항상 향이 나는 주머니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고 한다. 당 현종은 고질적인 축농증이 있어 양귀비의 암내를 몰랐다고 한다.
마약에 쓰이는 꽃인 양귀비는 당연히 여기서 따온 이름인데, 마치 마약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는 것처럼, 양귀비에게 빠져서 나라를 피폐 시킨 당 현종의 모습이 매우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잘 어울리는 직명이다.
백거이의 유명한 시 장한가는 양귀비와 당 현종의 사랑을 소재로 한 시다.
지금까지 근거는 미약하지만, 일본의 가수인 불세출의 가희 야마구치 모모에가 양귀비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야마구치 모모에 본인조차도 언론에서 이렇게 주장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자기 성은 원래 양씨라며 족보까지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계인 손정의가 자신의 성씨를 들어 조상 중에 중국계 혈통도 섞였다는 립서비스를 한 바 있었던 것처럼 조선 시대 일부 양반들이 족보에서 성씨의 시조를 이름 있는 중국계 인사들로 하던 유형에 맞물려있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어서 썼다는 설이 약간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원래 불타 죽은 사람은 양귀비가 아닌 시녀였으며, 양귀비가 도주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 도망간 곳이 다름 아닌 일본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양귀비는 돛 없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상륙하여 땅에 쓰러졌는데, 야마구치현 주민들이 양귀비를 발견해서 거기서 더 살다가 죽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사이에 후손을 남겼다고 하지만 이것은 신빙성이 아예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