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승은 기자 ] = 지난 23일 국회 법사위원장 등 주요 개혁 관련 상임위를 국민의힘에 넘기기로 한 더불어민주당의 '야합' 사태를 두고 지지층의 격한 비난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현재 거대여당 의석이면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는 검찰개혁이나 언론개혁, 재정개혁 등 우리사회 개혁과제들을 죄다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어서다.
특히 의원총회에서 이런 노골적인 '야합'에 찬성한 의원수가 무려 104명에 달하고 '반대' 의사를 밝힌 의원 수는 15명에 불과하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더욱 지지층의 분노가 들끓고 있다. 자신들이 마땅히 짊어져야할 '책임'은 회피하면서 효능감 없는 정치로만 일관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내서다. 민주당 지지층에선 개혁을 회피하고 자리보존에만 집착하는 정치인들에 대해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의미로 '수박'이라는 표현을 붙이고 있다.
국회 법사위원장은 체계·자구심사 권한을 이용해 법안 통과에 있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국회 법사위는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을 체계와 자구 심사라는 명목 아래 검토하곤 하는데, 법사위원장이 문제를 삼아 본회의 상정을 기피하거나 집행을 거부하면 법안처리가 지연되거나 불발되곤 한다.
법사위원장은 상대 정당이 주력하는 법안을 법률적인 것이 아닌 정치적인 이유로 가로막을 수 있는 셈으로, 사실상 국회의 '상왕' 격이란 소리까지 듣는다. 법사위원장 자리를 국민의힘에 내줄 경우, 각종 개혁법안들이 가로막히는 것이며 통과되더라도 상당기간 지연될 수밖에 없다. 법사위원장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는 국민의힘에서 몸소 증명해줬었다. 국민의힘은 지난해 6월 원구성 합의 때 '법사위원장 못 받으면 다른 건 의미 없다'며 모든 상임위원장 자리를 자진 포기한 바 있어서다.
이런 '야합'에 반대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개혁파' 정청래 의원은 앞장서 총대를 메고 송영길 대표와 윤호중 원내대표에 정면으로 맞서 "나쁜 합의는 철회돼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정청래 의원은 당 지도부에 거듭 의원총회 소집을 요구하고 있다.
정청래 의원은 30일 페이스북에서 "지금 당지도부의 네비게이션은 고장나 있다"며 "당원들도 대선후보도 국회의원들도 재고를 요청하고 있다. 정치 길치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당 지도부의 법사위원장 양도라는 '야합' 사태에 대선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힌 상태다.
정청래 의원은 "21대 국회 민주당 1호 당론은 일하는 국회, 법사위 체계자구 심사권 폐지였다"며 "누구 맘대로 1호 당론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가? 당론이 부침개인가?"라고 따져 물었다. 민주당은 지난해 7월 법사위 체계·자구심사권을 폐지하는 내용이 포함된 국회법 개정안을 소속 의원 전원의 명의로 당론 발의한 바 있다. 그래서 이번 '야합'은 모순된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청래 의원은 지난 26일 '박시영TV'에 출연, 이번 '야합' 사태에 대해 "(자신이 20대 총선에서)컷오프 됐을 때보다 더 열받았다. (지난)4~5년 동안 이번처럼 화가 났던 적이 없다"고 심경을 밝혔다. 정 의원은 "저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실제로 당원과 지지자들은 얼마나 화가 났을까"라고 목소릴 높였다.
지지층의 비난 여론이 쏟아지자 윤호중 원내대표는 지난 2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법사위를 야당에 그냥 넘기는 것이 아니다"라며 "법사위의 체계·자구심사권 이외에 법안 심의를 할 수 없도록 했다. 체계·자구심사 기한도 120일에서 60일로 단축했다"고 설명했으나, 이에 정청래 의원은 "의미가 없다"고 일갈했다.
체계는 법의 체계가 맞는지 혹은 다른 법과 충돌하는지 등을 확인하는 것이고, 자구는 문장이나 용어 등이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정청래 의원은 "이걸 꼭 법사위가 봐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라고 했다.
정청래 의원은 국회의원이 법안을 발의하면 법사위에 가기 전까지 세 단계의 체계·자구심사를 거친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법안을 발의하면 국회 입법조사처→해당 상임위의 수석전문위원→법안 소회의의 정부 고위 관료, 세 단계를 거친다는 것이다.
국회 직원들인 입법조사처 직원이나 상임위 수석전문위원의 경우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며, 법안 소회의에는 부처의 차관·실장·국장·과장 등 수십년 동안 해당 분에 종사한 전문가들이 참석한다는 게 정청래 의원 설명이다.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자 법 기술자들이 세 차례나 체계·자구심사를 통해 발의된 법안들을 꼼꼼하게 검토한 다음, 문제가 없으면 법사위에 올린다는 것이다.
정청래 의원은 "실제로 법사위에서 체계·자구심사 권한을 이용해서 체계·자구심사를 하지 않는다"며 "다른 법 잡는 법, 딜레이시킬 거 하는 거다. 그래서 체계·자구심사권을 빼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설명했다.
정청래 의원은 법사위에서 체계·자구심사 권한을 놓지 않으려는 이유에 대해 "기득권이다. 여야 문제도 상관없다"며 같은 당 의원들끼리 충돌하는 사례도 있다고 했다. 정 의원은 "여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걸, 여당 의원이 실제로 (법사위에서)잡아서 얼마 전 국회본회의에서 난리났다"고 했다.
한 여당 의원이 건축 관련 법안을 발의했는데, 이를 같은 당 의원이 법사위에서 잡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안을 발의한 의원이 "니들이 건축법 아냐? 내가 건축 전문가인데 니들이 왜 잡는 거냐?"라며 항의했다는 것이 정청래 의원이 소개한 일화다. 정청래 의원은 "이런 것(체계·자구심사권)을 빼버리면 법사위를 가져가라고 해도 안 가져간다"고 강조했다.
정청래 의원은 또 '법사위는 체계·자구심사 범위 안에서만 심의한다'는 윤호중 원내대표의 주장에 대해서도 "의미 없다"고 일축했다. 정 의원은 "박지원 국정원장이 '국회의원의 뚫린 입을 누가 막냐'는 아주 유명한 말을 했다"며 "체계자구심사와 관련없는 것을 막 얘기한다"고 설명했다.
정청래 의원은 "체계·자구심사 범위를 벗어났다(고 지적하면), '제가 봤을 때는 체계·자구심사범위 안에 있다'(라고)하면 누가 제지할 거냐"라고 일갈했다. 즉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정청래 의원은 윤호중 원내대표를 겨냥해 "누굴 바보로 아느냐. 그걸 법사위 개혁안이라고 디밀면 그걸 누가 속아주나?"라고 질타하며 "그런 부분이 더욱 화가 난다. 국회의원들을 바보로 아나? 그걸 가지고 법사위를 이제는 넘겨줘도 괜찮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거듭 일갈했다.
정청래 의원은 "법사위가 이렇게 하는 것도 오만이라 생각한다"며 "구속자로서 형사소송법과 국가보안법은 제가 어떤 법조인보다 전문가"라고 말했다. 정청래 의원은 군사정권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옥고를 치른 적이 있다. 그는 "법사위에 율사 출신 아닌 사람도 많다. 노회찬 의원도 법조인 출신보다 더 잘했다"라고 강조했다. 즉 법조인 출신이라 하더라도, 모든 법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당은 지난해 개헌 빼고 다 가능한 의석을 얻었고, 모든 상임위원장 자리마저 차지하며 수많은 개혁법안들을 처리할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이낙연 전 대표 체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큰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고, 서울시장·부산시장 재보궐선거 참패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자초했다.
여기에 송영길 대표 체제마저 또 '협치'를 내세우며 개혁에 손 놓으려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이자, 지지층의 인내도 드디어 폭발한 셈이다. 특히 윤호중 원내대표의 경우 입으론 '개혁'을 외쳐놓고 정작 행동은 '야합'을 주도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며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