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용간편 用間篇」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따라서 삼군에서 가장 믿어야 하고 가장 후한 상을 내려야 할 대상은 첩자다. 또 가장 은밀한 기밀을 부여받은 것도 첩자다.
사람을 알아보는 뛰어난 지혜가 있는 자가 아니면 첩자를 활용할 수 없다. 인의(仁義)를 겸비해서 사람을 진심으로 복종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첩자를 부릴 수 없으며, 미세한 곳까지 살필 줄 아는 명철한 판단을 가진 자가 아니면 첩보의 진실을 분간할 수 없다.
미묘하고도 미묘한 것이 첩보 활동이다. 첩자와 첩보 활동이 소용되지 않는 곳은 없다.
첩보전은 쌍방이 힘을 기울여 각축을 벌이는 중요한 부분이자 수단이다. 『손자병법』총13편 중에는 첩자 활용에 관해 전문적으로 서술한 「용간편」이 있는데, ‘용간(用間.-간첩을 활용)이 소용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고도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적의 정세를 장악하고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손자는 첩자에게 후한 상을 내릴 것을 강조하면서 “다섯 가지 간첩에 의한 첩보 활동이 함께 전개되어도, 적으로 하여 아군이 어떻게 자신들의 정세를 알아내는지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점과 정보원을 널리 개척할 것을 강조한다. 『백전기법』「간전 間戰」에서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정벌을 하려면 먼저 첩자를 사용하여 적의 숫자와 허실 및 동정을 엿본다. 그런 다음 군을 일으키면 큰 공을 세우기 쉽고 따라서 필승이다.
현대의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적의 정보를 얻는 일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정확한 정보는 전쟁의 승부를 결정할 수도 있다.
전국시대 위(魏) 공자 신릉군(信陵君)은 간첩을 적절히 활용하여 어떤 사태를 미리 파악하곤 했다. 『사기』「위공자열전 魏公子列傳」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언젠가 공자가 위왕과 함께 쌍륙을 놀고 있는데 북방의 국경에서 봉화가 오르더니 “조나라군이 기습하여 방금 국경선을 돌파하려 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위왕이 쌍륙을 그만두고 대신들을 소집하여 상의하려는데 공자가 이렇게 말했다.
“조왕이 사냥을 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침공이 아닙니다.”
그러고는 태연히 쌍륙 놀이를 계속했다. 그래도 왕은 걱정이 되어 쌍륙에 관심이 싹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다시 북방에서 전령이 와서 “조왕이 사냥을 한 것이지 침공한 것이 아니랍니다”라고 보고했다. 위왕은 크게 놀라며 물었다.
“공자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소?”
“신의 식객 중에 조왕의 비밀을 탐지하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그가 조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알려주기 때문에 이번 일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있던 후에 위왕은 공자의 능력이 두려워 그에게 국정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위공자 신릉군은 식객들을 첩자로 삼아 조나라 사령부에 침투시켜놓고 조나라의 일거일동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릉군이 『위공자병법 魏公子兵法』이라는 책을 썼다고 하는데, 그 책에 간첩 활용에 관한 나름, 대로의 견해가 많이 실려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듯 간첩을 잘 활용했던 신릉군도 그 뒤 위나라 왕이 진(秦)나라의 반간계(反間計.-반간첩 계략)에 걸려드는 바람에 위왕의 신임을 잃고 서글픈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를 통해 춘추전국시대부터 이미 간첩전이 대단히 높은 수준에까지 이르렀음을 엿볼 수 있다.
2차 대전 당시 소련군 총사령부는 반격 작전을 결정해야 하는 시점에서 시베리아 군단을 움직일 것이냐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베리아 군단은 반격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가진 유일한 존재였다. 만약 이 전력을 독일과의 전투에 투입한다면 동쪽에 공백이 생겨 일본의 침공을 초래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소련은 양면에서 협공을 받아 곤경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 군단을 파견하지 않으면 독일군에 대한 반격이 불가능하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위급한 순간에 사령부는 동경에 밀파되어, 있는 스파이 조르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를 받았다. ‘1941년 9월 15일 이후로 소련 극동은 일본 방면으로부터의 위협을 배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됨’
이 정보를 바탕으로 사령부는 신속하게 시베리아 군단을 반격 전략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을 계기로 타개책이 보이지 않던 국면이 곧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