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마는 늘 있지만, 명마(名馬)를 알아보는 안목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비(劉備)는 현명한 군주였고 제갈량(諸葛亮)은 현명한 재상이었다. 이 군주와 재상은 중국 민족의 문화적인 이상으로서 의심할 여지 없이 영원한 가치와 매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현명한 군주와 재상이 왜 전국을 통일하고 한나라를 계승하지 못했는지는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후세 사람들도 그 점이 안타까워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두보(杜甫)는 자신의 시에서 “출병이 늦어 몸이 먼저 죽었고, 늘 영웅들을 부렸으나 옷깃 흥건히 눈물 적셨네.”라고 읊었다. 안타까움과 슬픔을 잠시 뒤로 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보자.
제갈량이 뛰어난 인재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제갈량을 만나기 이전에 유비는 생애의 반을 전쟁터에서 보냈지만, 변변히 머물 수 있는 영토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갈량을 만난 뒤에는 조조(曹操)를 격파하고 형주(荊州)에 주둔했으며 나중에는 서천(西川)을 획득하여 나라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제갈량의 역할은 당연히 중요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언제나 자기 홀로 전체 판도를 지탱한 감이 있다. 관우, 장비, 조운 등은 사실 재능보다 용기가 뛰어난 장군들이었다. 이에 비해 조조는 무수한 책사와 맹장들을 부하로 거느려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운이 따르지 않아 조조처럼 인재를 만나지 못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천리마는 늘 있지만, 명마를 볼 줄 아는 안목은 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제갈량은 많은, 인재들이 있는데도 그들을 잘 활용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인재의 발견과 활용이 서툰데 있었다. 위연(魏延)과 마속(馬謖)의 일화가 이를 증명해준다.
위연은 자가 문장(文長)이며 의양 사람이다. 그는 삼국시대에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지만 이보다는 억울한 최후를 당한 것으로 이름을 남겼다.
위연은 장사지역에서 투항한 무장이었다. 제갈량은 처음부터 그가 반골(叛骨) 기질이 있음을 알아봤지만, 유비가 만류하여 그를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가의 윤색에 불과할 뿐, 실제 역사적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위연은 유비를 따라 남북으로 원정을 다니면서 풍부한 경험을 쌓고 명장으로서의 재능을 발휘했다. 유비가 촉(蜀) 지방을 정벌하기 전에 그는 군중에서 별다른 명성을 얻지 못했다. 촉을 정벌한 뒤에도 그의 직위는 아문장군(牙門將軍)에 불과했다.
그런데 인재 식별에 능했던 유비가 그를 썩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한중왕(漢中王)이 되자마자 파격적으로 그를 한중을 관리하는 태수 겸 장군으로 발탁했다. 당시에 한중은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연히 뛰어난 명장이 그곳을 지켜야 했다. 사람들은 그 자리를 맡을 사람은 장비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장비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무명의 하급 군관이 그 자리에 올랐으니 전군이 놀라 술령대고 뒷말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유비도 그런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위연의 위엄을 세워주기 위해 특별히 군신들을 모아놓고 그에게 한중을 지킬 자신만의 방법을 이야기하게 했다. 먼저 유비가 그에게 물었다.
“지금 그대에게 무거운 책무를 맡겼는데, 그대는 어떻게 하려고 하시오?”
“조조가 천하를 일으켜 쳐들어오면 대왕을 위해 항거할 것이며, 10만 군대로 쳐들어오면 역시 대왕을 위해 쳐부술 것입니다.”
위연의 기백에 군신들이 설복당했고, 이로써 위연은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위연은 말만 번드르르한 인물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중임을 맡을 만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조조에 맞서 북쪽을 정벌한 여러 전투에서 그는 조조의 명장 장합(張郃), 왕쌍(王雙), 곽회(郭淮) 등을 죽였다. 이 세 사람은 제갈량조차 두려워하던 인물들이었다.
건흥(建興) 8년(231), 위연은 서정대장군(西征大將軍)으로 승격되고 남정후(南鄭侯)에, 봉해졌다. 이때 위연은 여러 방면에서 원숙해졌으며 독자적으로 한몫 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갖췄다. 그렇다면 그는 왜 끝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켜 목숨을 잃은 것일까?
그 원인을 규명해보면 우선, 제갈량과 성격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연은 긍지가 높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즉, 그는 다소 오만하고 다른 사람을 깔보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제갈량은 일생, 동안 신중하기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개척정신이 풍부하고 위험을 무릅쓰는 건의는 잘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런 건의를 하는 이들을 계속 제지했다. 위연은 매번 제갈량을 따라 원정을 다니면서 여러 번 모험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예컨대 그는 제갈량에게 병사 만 명을 내주길 청한 적이 있었다. 그는 포중에서 출발하여 진령을 따라 동진하다가 자오에서 북으로 방향을 틀어 열흘 내에 장안을 기습하고자 했다. 그런 다음, 동관에서 제갈량의 병력과 합세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위연의 이 전략은 당시 상황에서 매우 적절했다. 차근차근 공격해 나아가는 제갈량의 방법보다 훨씬 뛰어난 전략이었다. 적의 정황과 행로, 군수품 조달 등 여러 측면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짠 전략이어서 성공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설혹 실패하더라도 원정의 근본이 흔들릴 만큼 피해가 크지는 않으리라 예상했다. 무엇보다도 성공만 하면 엄청난 의미가 있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융중대(隆中對)’에서 이미 제기했던, 두 갈래 노선으로 중원을 협공하겠다는 구상을 잊어버린 듯했다. 이처럼 위연의 적극적인 제안은 매번 제약을 당했으니, 그가 불만을 품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제갈량은 편견을 갖고 위연을 대했다. 이것은 그의 커다란 실수였다.
두 번째 원인은 소인배의 중상모략이었다. 이미 제갈량이 위연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고 그를 믿지 않는 상황이었으므로 중상모략이 쉽게 먹혀들 수밖에 없었다. 위연을 음해한 소인배는 그와 심한 갈등이 있는 자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소인배가 제갈량과 친밀한 관계였으며 나중에 대권을 손에 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이 자는 바로 양의(楊儀)이다. 「비의전 費禕傳」 상편은 위연과 양의 두 사람이 ‘서로 증오하고 매번 말다툼을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을 가리켜 ‘물과 불의 관계였다’고 묘사한다. 서기 234년,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을 수행하던 중 병으로 쓰러졌다.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직감한 그는 위연을 따돌리고 몰래 장사(長史) 양의, 사마(司馬) 비의, 호군(護軍) 강유 등과 철군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면서 위연을 강등시키고 강유가 그 자리를 이으며, 혹시 위연이 따르지 않을 시엔 군대를 발동시킬 것을 결정했다.
제갈량이 이렇게 철군을 계획하긴 했지만, 위연이 양의에 불복하고 그 지휘를 거부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제갈량이 죽은 뒤, 양의는 쉬쉬하며 장례를 미뤘고 비의는 위연을 찾아가 의견을 물었다. 과연 위연은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승상이 죽었다 해도 내가 있지 않소. 관속들을 시켜 장례를 치르고 내가 군을 지휘하여 적을 무찌르겠소. 한 사람이 죽었다고 어떻게 큰일을 포기할 수 있겠소?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인데 양의에게 밀려 뒷전에 선단 말이오?”
비의가 제갈량의 생각을 잘 설명해줬다면 위연이 지시에 따를 가능성도 꼭 없지는 않았다. 아무튼, 곧 위연과 양의가 대립하면서 촉나라 군대는 한바탕 혼란에 휩싸였다.
전략에는 누가 옳고, 그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양의는 제갈량의 시신을 확보하고 왕이 하사한 보검을 지녔던 까닭에 그 자체로 정당성이 있었다. 이에 반해 위연은 반란군의 괴수로 몰렸다. 하지만 양의의 위연에 대한 태도와 그가 나중에 보인 행태를 관찰한다면, 어렵지 않게 그의 사리사욕과 야심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마대(馬岱)가 위연의 머리를 베어 바쳤을 때, 양의는 발로 밟으며 말했다.
“어리석은 놈, 다시는 악행을 저지를 수 없겠구나.”
사람의 본심은 끝까지 지켜봐야 알 수 있다. 위연을 죽여 정의로운 기개를 떨친 양의는 바로 성도로 돌아왔다. 그는 큰 공을 세운 자신이 마땅히 제갈량을 이어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중군사(中軍師)라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관직에 임명되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양의는 후회하며 말했다.
“승상이 죽었을 때, 군대를 일으켜 위연을 따를 걸 그랬구나. 이제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 말속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어디 한 점이라도 찾아볼 수 있겠는가!
위연은 제갈량이 죽은 뒤, 일시적인 충동 때문에 대세를 그르쳤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논공행상이나 처벌의 문제를 논하려는 게 아니다. 문제는 위연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었으며, 그렇게 된 원인은 전적으로 제갈량의 실책이었다는 데 있다. 그는 위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며, 위연 역시 제갈량 밑에 있으면서 자신의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인재 활용의 차원에서 제갈량은 조조에 비교해 한참 뒤처졌다.
마속(馬謖)을 참수한 사건에서도 제갈량의 잘못된 인재 정책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벤 이야기에서 아끼는 부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관의 안타까운 심정 속에 그가 얼마나 법 적용에 엄격했던가 하는 측면만 보곤 했다. 혹은 자신을 최대한 낮춰 반성하는 그의 정신에 감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제갈량이 마속을 죽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혹은 공을 세워 죄 갚음을 하게 하거나 전투 경험을 갖춘 대장으로 육성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장점을 살려주고 단점을 피하는 것, 이것은 인재 활용의 중요한 비결이다. 역사서를 보면 마속은 실제로 전투를 지휘하는 것보다 참모 역할에서 장점을 발휘했다. 제갈량은 그의 지략을 높이 평가했다. 어떤 때는 단둘이 이야기, 하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다. 서기 225년, 제갈량은 대군을 일으켜 남쪽 정벌에 나섰다. 그는 마속의 건의를 채택하여 맹획(孟獲)을 일곱 번 사로잡고 남서 지역을 평정했다. 사실 마속의 결점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유비였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제갈량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마속은 과장이 심하니 크게 쓸 수 없는 인물이오. 그대는 이점을 잘 살피시오.”
당시 유비는 영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는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면서 특별히 마속의 문제를 거론했다. 인재 활용의 측면에서 유비의 안목이 제갈량보다 훨씬 뛰어났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만약 제갈량이 유비의 유언을 명심하여 마속을 참모로만 활용했다면, 그래서 그를 장군으로 임명하지 않았다면, 마속은 분명 자신의 장점을 살려 참모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갈량은 처음 기산으로 출병하면서 위연, 오의(吳懿) 등 전투 경험이 풍부한 노장들을 제쳐놓고 굳이 마속을 선봉장으로 기용했다. 그는 사람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속의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하는 악수를 둔 것이다. 결국, 촉나라 군대는 수송의 요충지인 가정을 잃고 말았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핵심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다. 마속은 처음 선봉장을 맡아 가정을 잃었다. 응분의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굳이 그를 죽여야만 했을까? 실패의 원인은 마속 에게만 있지 않았다. 인재 활용을 잘못한 제갈량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그 당시 한 번의 패배로 마속을 죽이는 것에 대해 많은, 신하들이 찬성하지 않았다. 그를 죽일 것이냐, 공을 세우게 하여 죄 갚음을 시킬 것이냐로 매우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장완(張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를 아직 평정하지 못했는데 똑똑한 책사를 죽이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입니다.”
장완은 마속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을 주장했다. 그때 상황에서 매우 적절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다시 한번 사람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마속의 목을 베었다. 그가 마속을 죽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가 눈물을 흘렸건 안 흘렸건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10만의 군사들도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마속을 존경하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그런 상황에서 한 장수를 죽임으로써 군기를 엄격히 세울 수 있었을까? 또 군사들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들의 사기를 꺾지는 않았을까?
제갈량이 마속을 죽인 사건을 두고 역대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왔다. 진(晋)나라 사람 습착치(習鑿齒)의 의견은 이러했다.
“제갈량이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촉나라는 궁벽한 지역이라 인재가 적었는데도 영웅을 죽이고 변변찮은 이들만 등용했다. 엄격한 법 적용이 인재보다 우선했으니 어떻게 대업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인재를 가려 그릇에 따라 임무를 나눠주지 못했고, 선황제의 유언을 어겨 중원 땅을 잃었다. 게다가 유익한 인재를 죽인 건 더욱 그릇된 처사였다.”
마속이 죽을 때 나이 겨우 38세였다. 당시 촉나라의 문무신 가운데 그는 얻기 힘든 최상급의 인재였다. 그런데 맘껏 활약할 기회 한 번 얻지 못하고 비명에 가고 말았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전에 제갈량은 단 한 번도 장군의 목을 벤 적이 없었다. 아마도 마속의 죽음은 제갈량의 능력이 쇠퇴했음을 알려주는 징표인듯하다. 확실히 그는 촉 지방을 점령하던 때의 날카로운 기풍이 많이 꺾인 상태였다. 유비가 맡긴 대업을 끝내 완성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이미 예고, 되었던 것 같다.
사람 중에는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 인재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인재도 있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이 전자에 속하고 무식한 사람이 후자에 속한다. 지식인은 비교적 우수한 자각 능력으로 다양한 역할과 환경에 빠르게 적응한다. 물론 개개인의 천성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기민한 적응력으로 천성의 부족함을 보완할 수 있다. 반면에 무식한 사람은 타고난 성품을 고치기가 극히 어렵다. 그래도 그중에 재능이 뛰어난 몇몇 사람은 잘만 활용하면 특출난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마속은 유생이어서 약점을 고칠 수 있는 여지가 많았고, 위연은 지식이 짧은 무장이어서 그럴 수 있는 여지가 적었다. 그러나 그들은 본래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제갈량이 적절히 활용하기만 했다면 그들은 큰 인재가 될 수 있었다.
강유는 제갈량이 정한 후계자였다. 그러나 장군으로서의 그의 재능은 위연보다 못했고, 책사로서의 재능은 마속에게 미치지 못했다. 훗날 촉나라의 멸망에 얽힌 사실들이 이를 증명해준다. 강유의 재능은 기껏해야 부장(副將)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제갈량은 이런 사람을 국가의 기둥으로 삼아 위험을 초래하고 말았다.
제갈량은 사람이지 신(神)이 아니었다. 현명한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 끝에 한 가지 실수를 할 수 있고, 우둔한 사람이라도 역시 많은 생각 끝에 한 가지 얻는 것이 있다고 한다. 사실 제갈량의 실수는 결코 이상의 사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