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는 전례 없이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지배라는 한병철의 생각과는 달리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지배의 위기, 재생산의 위기라는 의미에서 실질적인 파국에 직면해 있다. 파국은 이미 일상적이다. 21세기에 들어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의 성장은 심각하게 둔화했으며 성장 중지가 이미 도래했다는 진단들이 그렇게 낯설지 않다. 1982년, 1987년, 1997년 등에 국지적으로 반복되던 위기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폭발로 전 세계적 경제 위기로 확산되었으며 은행을 살리기 위해 국가가 취한 '손실의 국유화' 조치는 이후 플래시 크래시(2010)와 같은 주가 폭락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재정 위기로 비화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재정 위기를 다중들에게 전가하기 위한 긴축 정책들은 사람들에게 더 나쁜 삶을 강요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정책은 곳곳에서 아래로부터의 항의에 직면하고 있다. 2011년의 전 세계적 반란은 혁명이 필요하며 그 혁명은 민주주의의 실질화(실질민주주의)와 아래(99퍼센트)로부터의 점거와 재전유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임을 알리는 절박한 신호였다. 필요(necessity)를 의미하는 라틴어 'necesse'는 'ne'와 'cedere'의 합성어로서 양보할 수 없고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이다. 전 세계의 다중은 축적의 위기와 파국을 삶의 위기와 파국으로 부단히 전가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공세 앞에서 혁명 없이는 결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래서 혁명은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인류와 삶을 위한 지상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
그렇다면 혁명은 실제로 가능한가(possible)? 이 물음은 '다중이 혁명할 힘(posse)을 갖고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피로 사회>나 <투명 사회> 등 한국어로 번역된 한병철의 책들은 이 물음에 '아니오'라고 답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심리 정치>(문학과지성사, 2015년 3월 펴냄)는 독일어판 부제 '신자유주의와 새로운 권력 기술'(한국어판 부제는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이 명시하듯이 혁명의 불가능성을 권력 기술의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입증하는 책이다.
한병철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의 권력 기술은 너무나 영리해진 권력이다. 권력은 스마트폰, 인터넷,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과 프로그래밍을 이용하여 소통의 무한한 자유를 기술적으로 보장한다. 디지털 기술과 프로그램에 유혹된 사람들은 이것들의 소비자가 되어 자신의 내면, 비밀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투명하게 공개하는 정보 회로 속으로 들어간다. 이 정보의 가속적 유통은 자발적이고 일차적인 감시, 외적이고 이차적인 감시, 그리고 전면적 네트워크화를 수반하면서 삶을 획일화하고 평준화한다. 권력은 이렇게 보편화된 디지털 소통을 빅데이터화하여 조종과 지배의 수단으로 삼는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이 일련의 과정이 결합하여 낳는 결과이다. 그것은 '디지털 교회'이고 그 속에서 메아리치는 '좋아요'는 '디지털 아멘'이다. 이 디지털 파놉티콘 정치는 군주 권력과 같은 죽음 권력도 아니요, 규율 권력과 같은 생명 권력도 아니다. 그것은 '심리 권력'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면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공개하고 감시하며 권력의 조종과 지배에 자신을 내맡기도록 만드는 친절한 유혹의 권력('친절한 빅브라더')이다. 이 권력은 주체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기분(Emotionen)을 조성하고 바로 그것을 통해서 권력에 대한 예속을 가져오도록 만드는 '기분 자본주의'의 권력이다. 그러므로 이 권력이 착취하는 것은 주체의 '자유' 그 자체이다.
이것이 <심리 정치>의 신자유주의 비판 요지이다. 이 새로운 권력 기술 아래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내용은 이미 이전의 책들, 특히 <피로 사회>에서 서술된 바이다. 사람들은 이 지극히 생산적인 권력에 저항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그들이 느끼는 자유 기분 속에서 피로로 소진되어 우울증 주체로 된다. 그들이 겪는 이 삶의 피로는 결코 분노나 저항 행동으로 분출하지 못하며 오히려 자신에 대한 무한한 수치심으로 내면화될 뿐이다. 이러한 판단에 근거하여 한병철은 최근에, 혁명은 불가능하며 혁명을 수행할 주체성도 없다는 1990년대에 (한국의 경우에는 IMF 위기 전에) 유행했던 포스트모더니즘적 테마로 돌아갔다. 다중이 새로운 혁명적 주체성이라면, 예속 주체들로 구성된 신자유주의 파놉티콘에 그러한 주체성을 위한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권력의 기술적 변화에 대한 <심리 정치>의 서술이 현대의 주권 이행의 세부적 현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측면에서 그의 신자유주의 권력 분석은 현대 권력의 기술적 장치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분석의 총체, 즉 '디지털 파놉티콘'론과 '기분 자본주의'론은 신자유주의 내부에 실존하는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그것들이 주체성의 실제적 동태와 관련된 현실의 다른 측면을 외면, 망각, 소거하는 과장과 일면화의 방법론에 의해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서술이 동시대의 정치 현실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그것에는 저항과 반란의 기억, 사실, 사건들이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게 삭제되어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무수한 저항들, 예컨대 1989년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봉기, 1994년 멕시코 사파티스타 봉기, 1996년 유럽의 공공 부문 파업, 1997년 한국 노동자들의 총파업, 정리해고와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항한 전 세계의 무수한 투쟁들, 2001년 아르헨티나 피께떼로 투쟁, 2003년 볼리비아 물 사유화 반대 투쟁, 2005년 프랑스 방리외 봉기, 2009년 그리스 민중 봉기, 2011년 북아프리카, 중동, 유럽, 미국 등지를 휩쓴 전 세계적 반란, 2013년 터키 게지공원 점거 시위 등은 한병철의 사유에서 어떤 의미 있는 분석 대상으로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출현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모국인 남한의 현실에 대한 서술은, 국내 현실로부터 유리된 그의 입지를 고려한다 할지라도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고 일면적이다. 그는 "오늘날 남한에서는 좀처럼 저항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우울증과 번 아웃(Burn Out, 소진)에 대한 커다란 순응과 공감대가 만연돼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한국 노동자들의 부단한 정리해고 반대 투쟁, 2000년 한국통신 목동전화국 점거 투쟁, 2005년의 부안 방폐장 건설 반대 투쟁, 2008년 전국적 촛불 봉기, 2009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2011년 김진숙 지도위원의 309일 고공 농성과 희망버스 투쟁,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과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 그리고 2014년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세월호 사건 진실 규명 투쟁 등을 완전히 삭제해 버리고서야 가능한 일면적 진단이다. 높은 자살률도 그것을 낳는 적대관계의 심화나 절박한 삶의 위기, 그리고 저항의 측면은 제외한 채 '자신을 향한 공격'이라는 측면에서만 조명되면서 혁명의 불가능성을 논증하는 자료로 인용된다. 그러므로 현실에 저항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저항과 혁명이 아닌 다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그가 현실에 실재하는 저항들을 삭제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왜 한병철은 자신의 사회 이론에서 저항과 반란을 말소하는 것일까? 왜 신자유주의적 삶의 단면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들은 '대안은 없다(TINA)',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신자유주의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비관주의적이고 억압적인 구호 뒤에 온순하게 정렬되고 마는 것일까?
<심리 정치>에 뚜렷이 표현되듯이 그는 '억압(규율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푸코의 명제를 '자유(친절 권력)가 있는 곳에 저항은 없다'는 명제로 재해석한다. 이러한 재해석은 사람들의 신체를 규율하던 훈육 정치로부터 사람들의 심리를 통제하는 심리 정치로 권력 기술의 이행이 있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전자는 사람들을 억압하지만 후자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억압은 자유로 대체된다. 이 선형적인 이행관은 현대의 정치적 이행을 권력의 기술적 이행으로만 파악하고 주권 그 자체의 이행으로 파악하지 않을 때 나타난다. 주권은 일자(一者)의 지배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주권 체제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즉 적대적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권력 기술은 주권이 이 적대 관계의 직접적 폭발을 저지하고 이것을 관리하기 위한 기술일 뿐이다. 한병철의 생각과 달리 훈육 정치도 억압만 하지는 않는다. 훈육 정치도 보호를 통해 억압의 실재성을 보완, 은폐함으로써 주권이 하나의 공동체로 나타나게끔 만든다. 보호는 자유만큼이나 효율적인 기술이었고 그런 만큼 체제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기술이었다. 자유로 대체되고 있는 것은 훈육 정치의 두 측면 중 보호의 측면이지 적대 관계에 기초한 억압 자체가 아니다. 훈육 권력은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해 주지만 통제 권력('심리 권력')은 각자 알아서 살아가도록 만든다. 서구에서 복지 기술의 채무 기술로의 이행이 그것이다.
이 이행이 억압을 사라지게 한 것은 아니다. 억압의 측면은 핵무장과 핵 확산을 비롯한 군사력의 거대한 축적과 군사기술의 정보적 혁신, 통제나 감시와 같은 치안 장치의 정교화와 일상화를 통해 지속되며 심지어 더욱 강화된다. 권력을 기술적 이행이 아니라 주권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 이행은 결코 비효율적 기술에서 효율적 기술로의 선형적 이행이 아니다. 그 이행은 퇴적적이며 혼성적이다. 우리가 제국의 주권을 혼성적이라고 진단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낡은 것은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층 아래에 퇴적되거나 새로운 것과 뒤섞인다. 신자유주의가 1991년의 이라크, 1999년의 유고슬라비아, 2001년의 아프가니스탄, 2003년의 이라크, 2011년의 시리아, 2014년의 우크라이나 등 끊임없는 국지전들과 신냉전뿐만 아니라 테러에 대한 전쟁이라는 일반화된 대 시민 내전으로 점철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러 형태의 전쟁은 전 세계의 다중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주기 위한 억압 장치로 기능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권 체제의 적대성에서 비롯되는 저항은 이 적대 관계가 해소되지 않는 한 말소될 수 없다.
이행을 권력 기술적 이행으로 이해함으로써 발생하는 더 근본적인 이론적 문제가 있다. 그것은 주체성 개념의 평면화와 소거다. 앞서 이미 언급했듯이 한병철에게서 이행은 기술적인 것이며 권력의 자기 최적화와 효율 증대에 의한 것으로 나타난다. 권력은 그야말로 자율적이다. 이에 반해 주체는 권력에 의해 주어진 자유의 길에서 예속으로 직행한다. 자기 계발, 자기 착취, 자기 통제, 자기 감시는 자유로운 예속의 형태들이다. 주권 체제의 적대 구도는 여기서 권력의 일방통행로로 평면화되며 주체는 권력과 합체되고 부품화되어 어떤 자율성도 갖지 않는 것으로 무화된다. 주체의 자율성이 실제적으로 자율적인 권력에 의한 외부로부터의 조종과 최적화, 즉 타율성의 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체성은 무력하며 주체적 변혁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이른바 '계급투쟁'의 세계사에 대한 물구나무선 표상이다. 여기서 권력을 구성하는 갈등적인 사회적 관계들은 사라지고 세계사는 실체적 권력의 독백, 모노드라마로 나타난다. 이러한 권력 물신주의적 관념이 표상하는 바와는 달리, 신자유주의적 '심리 정치'로의 이행은 결코 권력의 모노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1968혁명으로 대표되는 바, 훈육 정치에 대항하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의해 촉발되었고 그 투쟁에 대한 권력의 대응 속에서 탄생했다. 산업 노동에 대한 거부와 행복하고 자치적인 삶에 대한 혁명적 시민들의 요구로 인해 도래한 산업자본주의의 한계를 자본의 입장과 그것의 재생산 가능성이라는 방향에서 받아 적은 것이 신자유주의의 시작이었다. 이 반혁명이 혁명적 주체성을 포섭하여 그것을 역규정할 힘을 회복하게 되는 경우에도 그것은 주체성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즉 주체성에 의해 깊이 규정된다는 조건 하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 자치, 자율은 착취의 형식으로 사용될 때조차 삶의 절실한 요구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오늘날 삶의 내적 요구이면서 동시에 착취의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이의 그 긴장으로 인해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치열한 전장이 되는 것이다. 혁명의 실제적 가능성은 이 전장 내부에서 주어지며, 다중적 주체성이 삶의 자유를 착취로부터 분리시키는 방향에서 발휘할 기술적·정치적 자기 재구성의 능력에서 주어진다.
다른 삶
한병철은 신자유주의 주권 구성체를 갈등이 가로지르는 전장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 신자유주의의 '스마트' 권력을 고분고분 받아들이자고 제안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외부에 대한 공격'으로서의 혁명은 불가능하지만 자기 외부화로서의 '다른 삶'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자유주의의 전일적인 권력으로부터 벗어나서 다른 삶을 개시할 출구와 방법에 대한 모색을 멈추지 않았다. '무조건적이고 비대칭적인 친절함'(2005, <권력이란 무엇인가>), '사색적 삶'(2009, <시간의 향기>), '깊은 심심함'과 '오순절 공동체'(2010, <피로 사회>), '비밀과 불투명성'(2012, <투명 사회>) 등은 그러한 사유의 궤적들이다. <심리 정치>에서 그것은 이제 '바보 되기'로 나타난다.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 혁명의 실재적 가능성이기는커녕 자발적으로 예속됨을 의미한다고 보는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삶에 대한 추구는 탈주체화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 또 주체화가 심리학적 프로그래밍과 통제에 의한 '체험'과 '기분'의 심리 정치적 기술이기 때문에, 탈주체화는 탈심리화하는 '삶의 기술'을 요구한다. 그 기술이 바로 바보 되기이다. 네트워크에 낚이지 않고 정보가 없는 특이체질의 이단아인 바보만이 주체화와 심리화에서 벗어나서 완전히 다른 것, 즉 사건으로 이루어진 내재성의 장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그는, 그가 지금까지 폐기했던 언어들을 다시 불러들인다. 저항, 반란이 그것이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바보짓은 신자유주의적 지배 권력과 그것이 강제하는 총체적 커뮤니케이션과 총체적 감시에 반기를 든다'. 신자유주의의 효율적 권력에도 불구하고 저항과 반란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제국 '내부'에서 그것에 맞서 전개되는 전 지구적이고 일상화된 다중의 저항과 반란의 현실, 즉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저항과 반란의 형태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권력의 장치인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발생하는 것들이다. 그것은 지성의 외부에 있는 '지혜', 아우성의 외부에 있는 '침묵', 무리의 외부에 있는 '고독', 수평적인 것을 절단하는 '수직적인 것', 충만함의 반대인 '공허', 긍정성을 거부하는 '부정성'의 저항이며 반란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권력을 비판하되 그것과 싸우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장을 해제하고 거리를 두면서 그것을 응시하고 사색하면서 그 옆에 머뭇거리고 머무르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무위의 저항이다. 그는 활동적 삶이 본성적으로 과잉, 소진, 히스테리, 신경증, 우울증을 가져오는 정신적 탈진의 증상이라고 보기 때문에, 활동적이고 강한 저항에서가 아니라 이 약한 저항에서만 다른 존재, 다른 공동체가 탄생할 것이라고 믿는다.
다른 삶을 향한 이 비가시적 저항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러한 의미의 저항과 반란이 발견되는 고유한 장소가 있다. 그것은 철학사이다. '철학사는 바보짓의 역사다.' 오직 철학자만이 아이 같은 바보짓으로 심리 정치 권력의 심리적 주체화에서 벗어나서 다른 삶, 다른 시간을 개시할 수 있다.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의 공화국 구상에서, 이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예술가를 추방한다. 철학자 한병철은, 자신의 다른 삶에 대한 설계에서, 감응하고 생각하고 소통하며 제작하고 생산하고 행동하는 감각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성인 다중을 부인하고 배제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권력에 예속되어 있고 그들의 불만은 수치심으로 내연(內燃)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바보 되기를 위한 내재성의 장은 다중의 손이 결코 닿을 수 없는 높은 기둥 위('등주고행승'), '저 먼 곳', 활동적 삶의 '외부'에 있다. 한병철의 내재성의 장은, 들뢰즈로부터의 인용과 그 언어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유기적 기관들을 해체하면서 다중이 우글거리며 현실적인 것, 개체적인 것을 향해 새롭게 분화되어 나가는 생명적 폭발과 주사위 던지기 운동의 장인 들뢰즈의 내재성의 장과 너무 다른 이미지를 갖는다. 그것은 모든 개체적인 것, 현실적인 것, 감각적으로 다양한 것을 소거하여 검게 만드는 순수하고 공허한 어둠을 통해 열리는 세계, 캄캄한 밤의 신비한 세계이다. '사색'은 이 세계를 여는 방법이다. 사색은 활동의 중지로서 '신의 애정 어린 관심 속에 머무름'으로써 '신비로운 합일 속에서 분리선과 울타리가 완전히 해제'(<시간의 향기>, 177쪽)되는 '경험'이다. 한병철이 안내하는 이 세계로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는 노동하지 않고 사색하는 자들(철학자들, 사제들, 귀족들)이 특권을 잃지 않았던 근대 이전의 세계, 즉 중세와 고대의 저 영광의 시간에 머리를 조아리게 되며 그 고향의 시간에 대한 향수에 젖게 된다.
국가자본주의인 사회주의가 해체되고, 시장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가 제로 성장의 위기 속에서 낙수 효과는커녕 오히려 양극적 균열을 겪고 있는 우리의 21세기에, 신자유주의적 자본이 새로운 가치 창출 원천으로 주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때 혁명을 추구하던 사람들의 정서적 피난처로 주목받으면서 일대 붐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바로 복고(retro)다. 복고의 양상들은 다양한데, (고대나 중세에 근거하는) 신비주의와 신비주의적 공동체도 그들 중의 하나다. 한병철은 공장 노동이 재구성되고 확장되어 다중의 삶과 중첩되고 인지 노동이 헤게모니적인 것으로 되는 탈근대의 인지자본주의적 전환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이 전환 속에서 철학자인 그는 인지자본주의가 부과하는 사유의 노동화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받아들인다. 그의 신비주의적 방향 설정은 활동적 삶과 사색적 삶 모두의 노동화, 즉 노동의 절대화에 맞서면서 사색적 삶의 본래적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필사적 시도이다. 이 시도는 산업자본주의 하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논증한 마르크스적 사유를 탈근대적 상황에 기초하여 혁신하려 하기보다, 근대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향수를 이론과 관념 속에서 재현한다.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위한 노력을, 감각적이고 대상적이며 능동적인 인간의 활동성이 아니라, '순수'하고 '공허'하며 '부정'적인 사변에 기초하여 반유물론적 방식으로 재구성하려는 이론적 시도로 나타난다. 자본주의 형성기에 몰락의 위기에 처했던 귀족들의 자본주의 비판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매우 정확하게 폭로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시대에 대한 복고주의적 지향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의 실천적 극복을 가로막는 장애로 귀결된 바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완숙과 부패의 시기인 신자유주의 시대에 배제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양극화로 인해 해체 위기에 처한 중간계급에게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거세지는 것을 본다. 이 불안과 불만이 이론에서 어떤 방향으로 수렴되는가는 실천적으로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한병철에게서, 활동적 삶과 사색적 삶 모두의 총체적 소외를 가져오는 적대적 사회관계에 대한 실천적 폐지가 아니라 활동적 삶의 우위를 사색적 삶의 우위로 대체하려는 반유물론적 신비주의의 지향을 목도한다. 이 지향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예리한 이론적 비판이 실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옹호로 귀결되도록 만드는 근본 요소다. 이 때문에 유물론적 이론은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유를 우리 시대의 역사적 경향에 비추어 혁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위기 속에서 번성하는 전 마르크스적 관념론적 철학으로의 퇴행으로부터 마르크스적 사유를 지켜내야 하는 이중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복고주의적 동요의 시간이 신자유주의 속으로의 더 깊은 실추가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혁명을 위한 중지(cesura)로 기능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과제들이다.
필자 조정환은 계간 <실천문학> 편집위원(1988), 월간 <노동해방문학> 주간(1989∼1990)을 역임했고 현재 도서출판 갈무리 대표,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 겸 상임강사, <자율평론> 상임만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