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의사로 한국에서도 추앙받고 있다.
화타(華佗-145~208)는 자가 원화(元化)이며 본명은 부(敷)다. 그는 예주 패국 초현(譙縣) 사람이다.
실상 화타는 전업 의원이 아니었다고 한다. 정사 삼국지의 화타전에 그는 서주의 유명 인사였으며 여러 경전에 통달한 유식한 유생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양성(養性)의 방법에 밝았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화타의 나이가 백 세 가까이 되었지만, 장년의 용모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패국의 재상 진규(陳珪)가 화타를 효렴으로 천거하였고, 태위인 황완(黃琬)이 그를 조정에 출사하도록 불렀지만, 화타는 모두 응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당고의 화(黨錮之禍)와 같은 비극이 비일비재했던 불안정한 중앙정부에서 굳이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까지의 의술은 어떤 병이던 침(鍼)이나 내복약(內服藥)을 사용하고 그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화타가 살던 시대는 침구학(鍼灸學) 및 경혈학(經穴學) 자체가 발전도상에 있는 단계였고, 침구학의 일차적인 완성은 서진 때의 황보밀(皇甫謐)이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을 저술함에 이르러서이다. 또 내복약(內服藥) 사용의 일차적 완성, 즉 상한론(傷寒論)의 완성은 화타가 죽은 후인 210년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알려진 바로는 화타는 특수한 탕약(湯藥)인 마비산(麻痹散) 이라는 마취약(痲醉藥)을 사용하고 외과수술을 하여 병의 근본 원인을 적출(摘出) 하는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시대 마취를 이용한 외과수술을 실행한 것이다. 50년 동안 약을 먹어 나을 수 있는 병을 한 번의 수술로 끝장내니 신의(神醫)로 추앙받음은 당연지사다.
화타가 실제로 외과적인 개복(開腹) 수술을 했는지는 논란의 대상이나, 마비산을 복용시켜 환자가 잠든 후, 복부를 절개(切開)하여 장기의 일부를 도려내고 실로 봉합하여 수술을 마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대의 외과 수술의 방식과 상당히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외과 수술의 핵심인 소독과 수혈 부분의 언급이 없어, 실제로 화타가 위와 같이 수술을 했다 해도 사망률이 매우 높았을 것으로 해석된다. 또 화타가 수술의 전수를 언제 누구로부터 받았다는 기록이 없을 뿐 아니라 제자 중 누구에게 가르침을 주었다는 사실은 거의 전설적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는 점이 생략되어 화타가 진정한 외과 수술을 하였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많다. 다만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 인도 문화권에서도 대마, 아편 등을 이용하여 진통 및 마취를 한 기록도 있고, 인도 경전에 마취, 절개, 봉합의 순으로 이어지는 수술기록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남미 등지의 미라(연부조직이 부패 되지 않고 말라 굳어진 인간이나 동물의 반영구적 사체)에서 외과 수술 흔적이 발견되는 등 고대시대에 외과수술이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상황에서 중국 고전에 나와 있는 화타에 의한 수술기록을 완전히 허구라는 단정은 잘못된 성급한 판단이다. 한 대에는 실크로드로 로마, 인도 등이 모두 중국에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의술 역시 상호 주고받는 관계였을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 외에도 동물의 몸동작을 보고 건강 체조를 고안하여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체질을 건강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전해지는데 곰 체조, 호랑이 체조, 사슴 체조, 원숭이 체조, 새 체조 등 다섯 동물의 동작을 본떠 오금희(五禽戱)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에서 아직도 전해진다.
화타는 편력의(徧歷醫)라 불리는 의사로서, 블랙잭이나 닥터 K처럼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여러 곳과 여러 진영을 돌아다녔다는 사례도 수두룩하며, 이로 인해 결국은 목숨을 잃는 재앙을 맞게 된다.
208년 무렵 조조(曹操)가 두통이 워낙 심해 화타에게 자신을 치료해 달라고 청했으나 그는 한번 와서 이 질병은 단기간에 치료하기는 어렵고, 장기간 치료해야만 수명을 연장 할 수 있다고 하고 증상을 조금 호전시킨 뒤 돌아가서는 부인의 병이 위중하여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대며 몇 번을 다시 불러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는 정확하게는 차(差)라고 쓰였다. 즉 어느 정도 차도를 보였다는 뜻이다. 지략에 밝은 조조는 몇 번이고 거부당하자 이를 수상히 여겨 군현의 관리에게 명령하여 화타를 보내도록 했다. 화타는 자신의 본령을 견지하고 다른 사람을 모셔 녹을 먹는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그 길에 오르지 않았다. 조조는 매우 노하였으며, 사람을 보내 가서 살펴보도록 했다. 만일 화타의 처가 정말로 병에 걸렸다면 팥 열섬을 주고 휴가 기간을 더 늘려주도록 하고, 거짓이라면 체포하여 압송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아프다는 아내는 오히려 말짱하고 화타는 한가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화타는 허현의 감옥으로 넘겨졌으며, 신문을 받고 죄를 시인했다. 이에 대로한 조조는 즉시 그를 하옥시켰고, 결국 화타는 옥 중에서 생을 마쳤다.
의사로서의 재주가 몹시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조조의 일급 모사인 순욱(荀彧)이 재주가 아까우니 “화타의 의술은 매우 정통합니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있는 바이니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라고 살릴 것을 탄원했으나 조조는 걱정하지 마라며 “천하에는 이런 쥐새끼 같은 자가 없어져야만 한다.”며 화타를 가혹하게 고문했다. 화타가 죽음에, 임박하여 책 한권을 꺼내 옥의 관리에게 주고 이 책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했지만, 옥의 관리는 법을 범하는 것이라며 받지 않자 그 책을 불에 태웠다 한다.
조조는 나중에 사랑하는 아들 조충(曺沖)이 질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땅을 치며 후회했다고 한다. 화타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가 애지중지 가장 총애하던 아들인 조충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화타를 처형할 때 조충이 앓아눕게 되어 조조가 부랴부랴 처형을 취소했으나 명령이 사형장에 도달하기 직전 화타는 이미 처형된 후, 라는 얘기도 있다.
당시 조조의 병은 화타가 보기에는 ‘치료 불가능’ 상태였을 것이다. 후한서에 나오는 조조의 병은 두풍(頭風)이었는데, 현대의 삼차신경통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전부터 계속 앓아왔고 차도가 있었다면 치료 불가능이 아닐 수도 있다. 삼국지에서 조조를 냉혹한 사람으로 많이들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 조조는 굉장히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잘 받는 성격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따라서 치료가 가능, 하더라도 조조 본인의 성향과 지위를 감안 하면 재발이나 악화가 되어 치료한들 소기의 효과가 없게 된다. 그렇다고 은퇴하여 요양에만 전념할 상황도 아니었을 것이다. 한편 후한서에서는 상재좌우(常在左右)라고 하여 그보다는 오만하고 자기 재능을 과시하여 위정자들 밑에서 일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하니 화타의, 입장에서는 그냥 조조 밑에서 일하는 게 싫었을지도 모른다.
옥중에서 자신의 의술을 집대성한 책 청낭서(靑囊書)를 옥리에게 주어 의술을 전하려고 했지만, 그가 두려워 받지 않자 책을 태워버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화타에게는 직전 제자가 둘이나 있었기 때문에 아마 이 이야기는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 그 두 사람은 광릉 사람 오보(吳普)와 팽성 사람인 번아(樊阿)인데, 후한서에는 오보에게, 오금지희(五禽之戱)를 전수하고, 번아는 침술(鍼術)과 처방(處方) 중 일부를 전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그 시대가 도제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할 때 완전한 전수인지 아닌지는 의문이 남는다.
그의 저서로는 침중구자경(枕中灸刺經), 관형찰색병삼부맥경(觀形察色幷三部脈經), 화타내사(華佗內事), 화타방(華佗方), 청낭서(靑囊書) 등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모두 유실되어 일부 내용 들만이 다른 의서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진수(陳壽)는 화타의 진료, 두기의 음악, 주건평의 관상술, 주선의 꿈풀이, 관로의 점괘는 진실로 모두 현묘하고 정교하며 비범한 기술이고 옛날 사마천이 편작, 창공, 일자의 전을 지은 것은 불가사의한 것을 포괄하여 기록하고자 한 것이며 때문에 자신 역시 이런 것을 기록, 했다고 했다.
화타는 약품 처방에도 정통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끓일 경우는 불과 몇 종류의 약재를 합쳐 끓였으며, 마음속으로 약품의 분량을 가늠하고 다시 저울로 재지 않았다. 끓여서 익으면 환자에게 먹이고 약을, 복용할 때 주의사항을 얘기해 주었다. 이같이 하여 약을 먹으면 병이 완쾌되었다. 불과 한두 곳만을 선택하여 뜸이 필요할 경우 7~8회의 뜸을 시술하면 병세가 호전되었고, 침술이 필요하면 한두 곳을 선택하여 침술을 시행하여 환자의 병세를 호전시키기도 했다.
환자의 신체 깊숙이 병이 있어 침과 약으로 다스릴 수 없을, 경우에는 환자에게 마취약을 먹여 잠들게 한 후 환부를 절개하여 깨끗하게 씻어내고, 다시 봉합하여 고약을 붙였다. 4, 5일이 지나면 차도가 있어 통증이 없어지고 환자 또한 스스로 회복됨을 인지하며 한 달이면 완쾌되었다.
동양현 진숙산의 작은아들이 두 살 때 병에 걸려 변을 보지 못해 항상 먼저 울었으며 하루하루 쇠약해져 갔다. 화타에게 묻자 이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를 가졌을 때 태아를 자라게 하는 데 양기가 집중되었으므로 모유를 먹는 아이는 어머니의 차가운 성분을 섭취하였기 때문에 나을 수 없다고 말했으며 화타는 네 가지 약재를 합쳐 만든 여완환을 먹였는데 열흘 후에 병세가 사라졌다.
감릉에 사는 어떤 부인이 임신한 후 6개월이 되었는데 복통으로 편치 못했다. 화타는 그 부인의 맥을 짚어보고 태아는 벌써 죽었다고 말한 뒤 사람을 시켜 손으로 더듬어 태아의 위치를 살피도록 하고, 왼쪽에 있으면 사내아이고, 오른쪽에 있으면 여자아이라고 했다. 위치를 살핀 사람이 왼쪽에 있다고 말했는데 그래서 탕약을 배합하여 태아를 씻겨내리니, 과연 그 아이는 사내아이였고, 즉시 그 부인의 통증도 사라졌다.
현의 관리 윤세는 사지에 열이 나고 입안이 마르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고, 소변도 순조롭지 못하였다. 화타는 시험 삼아 뜨거운 물을 마셔보아 땀이 나면 쾌차하고, 땀이 나지 않으면 사흘이 지난 후 죽을 것이라고 했다. 즉시 뜨거운 음식을 만들어 먹어, 보았으나 땀이 나오지 않았으니 장기가 이미 체내에서 끊어졌고 눈물을 흘리며 울어야만 기를 이을 수 있다고 하여 그대로 따라 하니 과연 화타의 말과 같이 되었다.
평성태수의 부인이 밤에 변소에 갔다가 전갈에 손을 쏘여 신음소리를 내며 아파했지만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화타는 사람을 시켜 탕약을 뜨겁게 하여 그 속에 손을 씻어내도록 하였다. 이같이 하니 즉시 잠을 잘 수 있었는데, 간호하는 사람이 여러 번 탕약을 바꾸어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하였는데, 날이 밝자 통증이 사라졌다.
부(태위의 막부)의 관리 아심과 이연이 함께 화타에게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두 사람 모두 두통과 전신에 열이 있었으며, 느끼는 고통이 똑같았다. 화타가 아심은 설사를 해야만 되고, 이연은 땀을 내야만 합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병은 같은데 치료 방법이 다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화타는 아심은 체질이 겉으로 튼실하고, 이연은 속이 튼튼하기에 당연히 다르게 치료해야 한다고 했고 즉시 각자에게 약을 주었는데, 다음 날 아침 두 사람 모두 병이 완쾌되어 일어났다.
군대의 관리인 매평이 병에 걸려 업무를 중단하고 광릉현의 집으로 가는 도중 2백 리를 남겨두고 친척 집에 머물렀다. 오래지 않아 화타가 우연히 이 집에 오게 되었는데 집주인은 화타로 하여 매평을 보도록 했다. 화타가 당신이 나를 일찍 만났다면 이 자경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 하고 지금 질병이 이미 다했으니 빨리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만나라 닷새 후면 죽는다고 했는데 매평은 즉시 집으로 돌아갔고, 죽은 기일은 화타가 말한 것과 같았다.
염독의 엄흔(嚴訢)이 몇 사람과 함께 화타를 찾아왔다. 그들이 도착하자 화타가 엄흔에게 당신의 몸은 탈이 없느냐고 질문했고, 엄흔은 평상시와 같다고 했다. 화타는 화급을 다투는 병이 있는 것이 얼굴에 나타나 있으니 술을 과음하지 말라고 했다. 엄흔 등은 담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몇 리를 가다가 엄흔이 갑작스레 현기증이 나서 수레 위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은 그를 부축하여 수레에 태워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튿날 밤에 죽고 말았다.
화타가 길을 가다가 목구멍이 막히는 병에 걸린 환자를 만났다. 이 사람은 음식을 먹지 못해 집 식구들이 수레에 태워 의사에게 가는 도중이었는데 화타는 그 사람의 신음 소리를 듣고 수레를 멈추게 하고 살펴본 후 그들에게 방금 지나온 길옆에 빵을 파는 가게에 마늘을 부수어 시게 만든 것이 있으니 새 되를 사서 그에게 먹이면 자연스럽게 병이 없어진다고 했다. 화타의 말과 같이, 했더니 환자는 뱀 한 마리를 토해냈다.
이전에 독우의 순찰관을 지낸 돈자헌이 병에 걸렸다가 쾌차하여 화타에게 맥을 짚어보게 했는데, 화타가 몸은 아직 허약한 상태이니 수고로운 일인 방사(房事)를 하지 말라고 했다. 돈자헌의 아내는 남편의 병이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백여 리를 달려와서 그를 살펴보고 밤에 남편 곁에 머물며 운우지정을 나누었는데 3일이 지나자 병이 재발하였다.
독우 서의가 병이 들었으므로 화타가 가서 그를 진찰하였다. 서의가 어제 의조리 유조를 시켜 위에 침을 놓게 한 후에 찌르는 듯한 고통이 와서 누워서 편안하게 잘 수가 없었다고 하자 화타가 말하길 유조가 침을 위에 찌르지 않고 잘못하여 간을 찔렀다고 했다. 먹는 것이 하루하루 줄어들고, 닷새가 지나면 구할 수 없다고 했고 결과는 화타의 말처럼 되고 말았다.
이장군의 부인이 병세가 심각하였으므로 화타를 불러 맥을 짚어보도록 했다. 화타는 유산이 되었지만, 태아가 모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라고 말했는데 이장군이 유산이 확실하다면 태아는 이미 떨어진 것이라고 들었다고 했다. 화타는 진맥에 의하면, 태아는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장군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화타는 진료를 멈추고 떠났다. 부인의 병세는 점차 호전되었다. 백 여일 후에 병이 재발하였으므로 다시 화타를 불렀다. 화타는 ‘이 맥의 흐름을 판단하면 태아는 아직 있습니다. 이전에 두 아이가 생겼는데, 한 아이는 먼저 나왔는데 출혈이 매우 많았고 뒤의 아이는 출생하지 못했습니다. 산모는 자각하지 못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 또한 깨닫지 못했으므로 이어서 낳지 않았기에 출생하지 못한 것입니다. 태아는 죽었고 어머니의 혈맥은 다시 태아에게 돌아가지 않으니 태아가 말라서 어머니의 등골뼈에 붙어있기 때문에 등골뼈의 통증이 심했던 것입니다.’ 탕약과 침을 모두 사용하자 부인의 격렬한 통증이 아이를 낳을 때와 같았다. 화타는 이 죽은 태아는 너무 오래 말라 있었으므로 스스로 나올 수 없고 응당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찾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과연 죽은 한 사내아이를 꺼냈는데, 손과 발이 모두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었고 안색은 검었으며 몸은 1척쯤 되었다.
어떤 군의 태수가 병이 들었다. 화타는 그 사람이 크게 화를 내면 병세에 차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에게 많은 돈을 받고도 치료를 하지 않고 잠시 머물다가 환자를 버려두고 떠나면서, 태수를 욕하는 편지를 남겼다. 태수는 과연 화를 크게 냈으며, 사람을 시켜 화타를 추격하여 잡아 죽이도록 했다. 태수의 아들은 화타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관리들에게 쫓지 말도록 했다. 태수는 격노하여 검은 피를 토하더니 그 병이 낫게 되었다.
한 사대부가 몸이 불편하여 화타를 불렀다. 화타는 그의 병이 깊어 배를 갈라 절제해야 하나, 수명이 10년을 넘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대부는 고통을 못 참고 절제를 부탁해서 화타가 환부를, 수술했는데 환부는 좋아졌으나 10년이 지나자 결국 죽게 되었다.
조조가 화타의 소문을 듣고 불러서 항상 자기 곁에 있도록 했다. 조조는 두통으로 고생하였는데 매번 두통이 재발할 때마다 마음이 산란하고 눈이 몽롱했다. 화타는 침으로 횡경막을 찔렀으며 손이 따라가는 대로 병세가 사라졌다.
정사 삼국지 화타전에 따르면 화타는 어디까지나 스스로 선비로 여겼기 때문에 의원으로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사실 화타는 효렴으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기회도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평생을 은사(隱士)를 자처했는데, 어쩌면 남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는 것 자체를 거부하고 난세를 조용히 살고 싶어 했던 의중이 숨어있어 보인다. 현대의 의사들이 사회 상류층으로 대우받는 것과는 달리 전근대의 의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다. 당시 선비들의 입장을 고려해 볼 때 선비를 자처했던 화타가 자신의 이름이 선비가 아닌 의사로 알려지는 것을 기피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화타는 편작과 더불어 중국사 속의 가장 유명한 명의로 이름난 친숙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