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조작으로 소액주주들에게 피해를 입힌 BBK의 실소유주가 이명박 전 대통령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뒤 횡령 및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된 김경준씨(49·사진)가 ‘BBK 가짜편지’ 사건과 관련된 민·형사 재판에서 모두 승소했다.
BBK 가짜편지는 2007년 17대 대선 당시 김씨가 이명박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선 후보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여권(현 야당)과의 교감 아래 국내에 들어왔다는 ‘기획입국설’을 뒷받침했다. 이 편지는 이 전 대통령의 당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전지법 천안지원 민사2부(최병준 부장판사)는 김씨가 가짜편지 작성에 관여한 양승덕(62)·신경화(57)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피고들은 각자 원고에게 1500만원 및 이에 대해 2007년 12월부터 2015년 6월까지 연 5%의 이자(약 1000만원)를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2007년 12월13일 한나라당 홍준표 클린정치위원장은 김씨의 기획입국 증거라며 그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교도소 수감생활을 함께한 신경화씨가 김씨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편지에는 “자네가 ‘큰집(청와대)’하고 어떤 약속을 했건 우리만 이용당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로부터 3년3개월 후 신경화씨의 동생 신명씨(54)의 고백을 통해 이 편지가 날조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경희대 교직원이던 양씨는 2007년 11월 김씨가 당시 대통합민주신당(현 새정치민주연합) 측으로부터 국내 입국에 대한 대가를 약속받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편지 초안을 경희대 졸업생으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신명씨에게 전달했다.
이후 신명씨는 신경화씨 명의로 가짜편지를 작성한 뒤 김씨의 미국 변호인이던 심원섭 변호사에게 편지를 보낸 것처럼 국제우편 영수증을 조작했다. 신경화씨는 편지가 공개된 직후 자신을 찾아온 기자에게 “편지를 직접 작성했다”고 거짓말했고, 한나라당은 이 편지가 기획입국설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증거라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재판부는 “가짜편지로 인해 김씨는 정치권 기획에 따라 대선 직전 국내 송환을 선택한 자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면서 “양승덕·신경화씨 두 사람은 김씨에게 정신적 고통을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한편 대법원 2부(주심 박상옥 대법관)는 최근 김씨가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형사사건에서 무죄를 확정했다.
김씨는 2012년 10월 발간한 저서 <BBK의 배신>에 “정신이상자 같았던 신경화… 신경화는 교도소 안에서 도박·노름에 미쳤다”고 써서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재판부는 “공적 관심사안인 BBK 사건에 관한 진상을 일반 독자에게 호소하면서 기획입국설과 관련한 신경화씨 주장의 신빙성을 탄핵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판단했다.
[‘BBK 가짜편지’]이명박·다스·BBK
‘BBK 사건’은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경준씨가 동업자 관계였다는 데서 출발한다. 김씨는 1999년 4월 투자자문회사 BBK를 설립하고 주식투자를 시작했다. 2000년 2월 김씨는 이 전 대통령과 인터넷 증권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BBK와 같은 사무실에 LKe뱅크를 설립하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 전 대통령은 기자들과 만나 새로운 인터넷 금융사업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서울 강남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LKe뱅크의 자회사인 EBK라는 법인을 설립했다. EBK 운영에 필요한 자본금 100억원은 두 사람 명의의 LKe뱅크 주식을 해외 페이퍼컴퍼니에 팔아 조달했다. LKe뱅크 설립에는 이 전 대통령의 개인자금 30억원이 투자되기도 했다.
그런데 2001년 2월 BBK에 투자했던 삼성생명이 김씨의 펀드운용 보고서 위조 사실을 발견해 금융감독원에 신고했다. 검사 결과 ‘운용전문인력 부족, 김경준씨의 자금 횡령’ 등 문제점이 적발됐다. 이 사건 여파로 이 전 대통령과 김씨는 EBK를 설립해 증권업을 하는 게 어려워질 것으로 판단했다. BBK의 투자자문업 등록까지 취소되자 이 전 대통령은 LKe뱅크 대표를 사임했다.
2006년 6월 서울시장을 마친 이 전 대통령이 대선 행보를 본격화하자 정치권에서는 김씨가 BBK 자금을 동원해 코스닥 상장사를 인수한 다음 주가조작을 해서 319억여원을 빼돌린 ‘옵셔널벤처스 주가조작·횡령 사건’에 이 전 대통령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BBK에 190억원을 투자한 자동차부품 제조회사 (주)다스를 이 전 대통령이 차명 운영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은 “나도 그 사람에게 속았다. 김씨가 사기를 치고 도망가 자본 투자금을 받지 못해 다른 피해자들과 같이 소송을 했다”면서 “나는 BBK와 관계없이 LKe뱅크를 같이하자고 했던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후 미국 법원은 2011년 2월 옵셔널벤처스 소액주주들이 김씨와 누나 에리카 김을 상대로 낸 민사소송에서 김씨 남매에게 “37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런데 판결 직전 김씨의 스위스 계좌에서 (주)다스로 140억원이 건너갔다. (주)다스는 “BBK에 190억원을 투자했다가 140억원을 떼였다”며 소송을 냈지만 2007년 8월 1심에서 졌다. 정식으로 승소 판결을 받은 옵셔널벤처스 소액주주들보다 (주)다스가 먼저 돈을 받아낸 것이다.
2012년 10월 김씨는 “이 전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의혹을 수사 중인 특검팀에 증인으로 출석해 다스의 자금 흐름에 대해 진술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김씨는 저서 <BBK의 배신>을 펴낸 출판사에 보낸 편지에서 “다스는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도 무리해서 BBK에 190억원을 송금했다”며 “이 대통령이 다스를 소유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