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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 보수공사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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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 보수공사 완료.

전성남 선임 기자 jsnsky21@naver.com 입력 2018/04/07 18:47 수정 2018.04.07 20:30
임진왜란 당시 명·왜가 조선 빼놓고 화친…4년 뒤 정유재란으로 이어져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위치한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사진제공=용산구

[뉴스프리존=전성남 선임기자]서울시 용산구(구청장 성장현)가 최근 원효로4가 87번지에 위치한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이하 강화비)’ 보수공사를 마쳤다.

비석을 들어 올려 화강석 지대석을 놓고 주위에 울타리를 두른 것인데, 주민들이 강화비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문구로 안내판도 세웠다.

용산구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 일환이다.

강화비는 조선시대 비석으로 약 1.7m 크기로 지금으로부터 425년 전 즉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지난 1593년 당시 명군과 왜군 사이에 있었던 화의(和議) 결정을 담았다.

주변 설명 없이 ‘심원정 왜명강화지처(心遠亭 倭明講和之處)’란 아홉 글자만 음각돼 있지만, 그 의미는 상당하다. 16세기 말 동아시아를 뒤흔든 국제전쟁사를 여기서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592년 봄, 왜군은 15만 8천명에 이르는 대병력으로 전쟁 개시 한 달 만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용산 등을 본거지 삼아 작전을 벌였다. 남산을 등지고 한강변에 자리한 용산은 수운의 중심이자 천혜의 요충지였다.

하지만 평양성 전투와 행주대첩에서 패한 뒤 한양 이북에 있던 왜군은 모두 용산 일대로 퇴각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는 각각 현재의 원효로4가, 갈월동 일대에 주둔한 채 한양의 혹한기를 보냈고 결국 후방 철수를 위해 명을 상대로 화의를 요청했다.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93년 3월부터 화의 논의가 본격화됐고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과 고니시의 강화회담이 이어졌다. 당시 회담 장소가 용산강(용산자락 주변 한강을 이르는 말) 일대였고 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 아래 강화비가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단 심원정은 임난 이후 건립된바 비석 역시 조선시대 후기 어느 시점엔가 만들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사료 부족으로 인해 더 정확한 고증은 어렵다. 비석이 지정문화재가 아닌 향토문화재로 관리되는 이유다.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은 “조선은 왜의 침략을 받아 싸운 전쟁 당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섭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다”며 “강화비는 우리 후손들에게 많은 생각꺼리를 던진다”고 말했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 따르면 조선 조정은 퇴각하는 적을 섬멸코자 했으나 명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했다. 조선이 빠진 채 애매하게 진행된 화친은 결국 4년 뒤 정유재란으로 이어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은 1598년에 가서야 전쟁은 모두 끝이 났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왜명강화지처비는 임진왜란 당시를 회상하고 또 성찰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유물”이라며 “부끄럽고 쓰린 역사라 할지라도 이를 감추기보다 제대로 알고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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