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정말 역사학자들과 국민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들이 역사를 재단하려고 하면 다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될 리도 없고 나중에 항상 문제가 될 것이다.”(2004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역사에 관한 일은 역사학자가 판단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든 역사에 관한 것은 정권이 재단해서는 안 된다.”(2005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이랬던 그녀가 180° 바뀌었다.
“역사 교육을 정상화시키는 것은 당연한 과제이자 우리 세대의 사명이다.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2015년 10월27일 박근혜 대통령)
원칙과 신뢰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준 것은 언론이었다. 2012년 12월20일 <연합뉴스>가 박근혜 리더십을 분석한, ‘원칙과 신뢰’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정치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원칙과 신뢰’이다. 박 당선인이 지난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로 정치권에 입문한 후 수없이 강조해오면서 그의 정치적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2004∼2006년 한나라당 대표, 그리고 2011∼2012 비대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과정에서 시스템이나 기준에 따라 당을 운영하고 이러한 기조를 유지한 것에서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가 싹텄다는 평가다. ‘국민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정치적 소신이며 이에 따라 2004년 17대 총선과 2012년 19대 총선이 끝난 뒤 공약 이행을 챙김으로써 이러한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했다.”‘원칙과 신뢰’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표적인 브랜드다. 박근혜 대통령은 약속을 지킨다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아왔다. “저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았고, 한번 한 약속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켰다”(2007년 6월28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신뢰와 약속을 지키고, 말보다 행동으로, 생각보다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2007년 6월 전북대 강연에서), “국민 여러분, 저 박근혜는 약속 대통령이 되겠다. 국민과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다”(2012년 12월20일 대통령 당선 확정 후).
2012년 11월27일 <조선일보>는 “‘박, 약속은 지키는 준비된 후보’ 대 ‘문, 일자리 만들 소통하는 후보’”라고 썼다. 방송과 신문의 노력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신뢰받는 정치인으로서 위상을 심었다. 이는 대통령에 오르는 데 엄청난 자산이 됐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후 박근혜 대통령이 ‘원칙과 신뢰’를 저버린 일들이 다반사다. 역사 문제에 관해 주장이 180° 바뀐 것처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말 바꾸기는 되풀이되었다.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는 경우도 셀 수 없이 많다.
대선 전, 박 대통령은 ‘일생 동안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에 애쓰신 어르신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대선에 나섰다’는 말을 달고 다녔다. 대선 후,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노인들을 위한 공약은 폐기하다시피 했다. 나라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라는 소용돌이에 빠져 있는 동안, 박근혜 정부는 경로당 냉난방비 예산 310억원과 양곡비 예산 47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대선 공약의 히트 상품 ‘모든 노인한테 월 20만원의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도 철회했다. 모든 노인은 소득 하위 70%로, 20만원 일괄 지급은 ‘국민연금 가입 기간에 따라 월 10만~20만원 차등지급’으로 바뀌었다. 또한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지급되는 기초연금의 혜택을 형편이 어려운 기초생활수급 노인은 사실상 누리지 못한다. 정부는 기초생활수급 노인들에게 기초연금 20만원을 주는 대신 기초생활 생계급여에서 20만원을 삭감했다.
국회 공청회에 나온 강세훈 대한노인회 행정부총장은 “노인한테 지급하는 장수수당·축하금, 효행장려금, 기초생활 노인가구 월동난방비 지원 등 현금성 급여가 사실상 전부 중단되고 있다. 장수수당의 경우 기초연금 수급자를 제외하면서 소득 상위 30%인 ‘부자 노인’만 장수수당을 받게 된다”라고 말했다. 서울역에서 만난 김광수씨(73)는 “박 대통령이 기초연금과 일자리 수당을 두 배 올려준다고 해서 찍었는데 담뱃값만 2배 올렸다”라고 말했다.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 행복 10대 공약’은 선포했다. ‘세상을 바꾸는 약속’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박 대통령은 의욕을 보였다. “정책이 없어서 국민이 불행했던 것이 아니라 약속이 실천되지 않아서 문제였다”(2012년 7월10일 대선 출사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면 공약도 안 했을 것이다”(2013년 1월25일 대통령직 인수위). 그러나 10대 공약 가운데 지켜지고 있는 약속은 거의 없다.
첫 번째 약속, 가계 부담 덜기. 가계부채는 2010년 843조원에서 올해 6월 1130조원으로 급증했다. 올 2분기는 1분기보다 30조원 넘게 늘었다. 역대 최대 증가폭을 계속 경신 중이다. 가계부채는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 됐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가계부채는 빚을 권하는 사회 탓이다. 정부가 부동산 규제를 완화한 것은 가계부채를 늘려서라도 부동산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조치인데, 결국 서민들에게 빚내서 집 사라고 한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만 5세까지 국가가 무상보육 및 무상 유아교육을 하겠다는 건 박 대통령의 두 번째 약속이다. 그런데 10월28일부터 30일까지 어린이집 교사들이 단체 행동에 나섰다. 정부의 보육 예산 삭감 때문이다. 지난 9월 정부가 발표한 2016년 예산안에 따르면, 누리과정(만 3~5세) 예산이 한 푼도 책정되지 않았다. 지난해에도 정부는 올해 누리과정 예산 2조2000억원을 전액 삭감했다가 반발이 일자, 일부를 예비비 명목으로 지원했다.
세 번째 약속은 교육비 덜기다. 고등학교 무상교육, 사교육비 부담 완화, 반값 등록금이 주요 골자다. 하지만 기획재정부가 책정한 고교 무상교육 예산은 2015년에서 2018년까지 0원이다. 전혀 생각이 없는 것이다. 반면 사교육비 부담은 늘고만 있다. 교육부는 올해를 ‘대학 반값 등록금’ 실현의 원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학생과 학부모들은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6월 말 기준 학자금 누적 대출자는 150만명이고, 1인당 평균 대출액은 640만원이다. 2011년보다 30만원 늘어난 액수다. 정부 정책이 학자금 대출조차 줄이지 못한 셈이다. 연 2.7%인 장학재단의 학자금 대출금리를 낮추라는 야당의 요구를 정부는 계속해서 피하고 있다.
네 번째 약속은 암·심혈관·뇌혈관·희귀난치성 질환 등 ‘4대 중증질환’을 정부가 100% 책임지겠다는 것이었다. 2012년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 때 문재인 후보가 ‘4대 중증질환 진료비 100% 국가 부담’ 공약에 대해 물었다. 박 후보는 “비급여 부분 커버(포함)해 100% 책임지겠다”라고 답했다. 환자들이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 부분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당선 후 바로 없던 일로 돌렸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선택진료비(특진비)나 상급병실료·간병비 등은 국가 부담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5~7번째 약속은 일자리와 관련된 것이다. 우선 창조경제를 통해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공약은 아직 결과가 나온 게 없다. 오히려 실업률은 2012년 7.5%, 2013년 8.0%, 2014년 9.0%로 늘고 있다. 나쁜 일자리도 늘고 있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 비율은 2012년 9.6%, 2013년 11.4%, 2014년 12.1%(한국노동사회연구소 통계)로 조사됐다.
다음으로, 노동자들의 정년을 60세로 연장한다는 약속은 지켰다. 그러나 해고 요건을 강화하겠다는 약속은 버렸다. 10월28일 이종걸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은 근속연수 1년 미만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고 비정규직 비율도 45.4%에 달한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쉬운 해고와 낮은 임금만 강요한다”라고 말했다.
이러니 장시간 노동 관행을 없애는 등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올리겠다는 일곱 번째 약속이 잘 지켜질 리 만무하다. 지난해 한국 노동자들이 일한 시간은 평균 2163시간. OECD 34개 회원국 중 멕시코(2237시간)에 이어 2위다. OECD 평균 1770시간보다 22%나 많다. 한국의 노동자는 일본과 미국 노동자에 비해 연평균 약 400시간을 더 일한다. 하지만 임금은 훨씬 적게 받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OECD 국가 가운데 멕시코 다음으로 임금불평등이 심각한 것으로 조사됐다.
여덟 번째 약속은 성폭력·학교폭력·가정파괴범·불량식품 등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겠다는 국민 안심 프로젝트다. 경찰이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식품 단속에 굉장한 열의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무엇이 더 나아졌는지 아직 알려진 바 없다.
이제는 단어조차 사라진 ‘경제민주화’ 공약
아홉 번째 약속은 경제민주화를 통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이루겠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는 원동력이었다고 할 ‘경제민주화’ 공약 역시 일찌감치 폐기됐다. 박근혜 정부 절반을 지난 지금은 경제민주화라는 단어조차 사라졌다.
열 번째 약속은 지역균형 발전과 대탕평 인사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요직에는 특정 지역, 특정 학교 출신만 등용되고 있다. 지난 3월2일자 <문화일보> 기사 제목은 “국가 의전 서열 10위 중 8명 ‘영남권 출신’”이었다. 호남은 아예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전북일보>는 10월20일자 기사에 이렇게 썼다. “신임 장·차관급 10명 중 전북 출신은 한 명도 없고 경찰 경무관 이상 간부도 97명 중 1명뿐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은 “지난 9월 단행된 7명의 대장급 군 인사에서 호남 출신 인사가 전무한 데 이어 이번 개각에서도 호남 출신이 전무하다. 박 대통령이 ‘100% 국민통합의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지만 역사관만 100% 통합하려 하고 있다”라고 비꼬았다.
10대 공약 이외에도 군복무 기간 단축, 전시작전권 이양, 검사의 청와대 파견 제한, 재벌·대기업 사면권 제한, 320만명 신용회복 지원, 목돈 안 드는 전세정책 추진, 철도민영화 반대, 장애인연금 확대 등 박 대통령이 힘주어 말했지만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부지기수다.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약속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받은 6억원에 대한 이야기도 자취를 감추었다. 새정치민주연합 홍종학 의원은 “박 대통령이 국민과 한 약속을 버릇처럼 잊어버린다.
문제는 파기한 약속들이 법치주의를 훼손하고 시장경제의 기본질서를 무너뜨린 일이어서 더 심각하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JTBC와의 인터뷰에서 “내 생각이 대통령과 거리가 있는 게 아니라, (대통령의) 국민에 대한 약속이 바뀌었다면 바뀐 게 문제다. 이 정부가 국민한테 약속한 그 기조 그대로 끌고 갔다면 지금보다 훨씬 국정 운영이 잘되고 있으리라 믿는다”라고 말했다.
2012년 총선을 두 달 앞두고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말 바꾸기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은 이번에 반드시 뿌리를 뽑아야 우리 정치를 쇄신할 수 있다.” 이 발언들에 대해 박 대통령의 지금 생각이 어떤지 정말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