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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열의 도시의 산책자] 시노트 신부님, 우리는 당신을 ..
기획

[이치열의 도시의 산책자] 시노트 신부님, 우리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

이치열 기자 입력 2014/12/27 17:54 수정 2017.11.03 11:02

빈소는 서울 성모병원 장례식장(3호) 입니다. 장례미사는 26일 오전 11시 파주 참회와 속죄의 성당입니다."

이 문자를 받은 것이 크리스마스 이브, 24일 아침이었습니다. 제임스 시노트 신부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뵌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병석에 계신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은 배웅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민주화운동의 결실을 조금이나마 맛봤던 저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차를 몰고 상당히 먼 산책길에 나섰습니다.
 

성산대교를 건너 자유로를 타고 북쪽으로 시원하게 달립니다. 기온은 차지만 햇살은 따사롭습니다. 한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한 그곳에서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가고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습니다. 60년 분단으로 갈 수 없는 땅이 이렇듯 지척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오두산통일전망대가 있고, 가까운 곳에 ‘민족화해센터’와 천주교 의정부교구 소속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 있습니다. 

   
▲ 26일 오전 경기도 파주 참회와 속죄의 성당으로 제임스 시노트 신부의 관이 들어서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26일 오전 경기도 파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열린 고 제임스 시노트 신부(가운데 액자 사진)의 장례미사에서 성찬의 전례가 진행되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장례미사에는 동료 선교사들을 비롯해 사제 50여 명과 평신도, 수도자 250여 명이 참석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제임스 시노트 신부(한국명 진필세)는 유신독재 박정희 정권의 사법부가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을 사법살인했던 소위 인혁당 재건위(제2차 인민혁명당)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알리고 이들에 대한 구명 운동을 하다가 추방당했던 선교사입니다. 그는 1961년 미국에서 한국으로와 인천교구에서 일하던 중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접했고,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고문 등으로 조작되었음을 국내외에 알렸지만 8명은 법원의 사형선고 18시간만인 1975년 4월 9일 새벽에 사형되었고 신부는 4월말에 추방됐습니다.

다시 한국에 살기 위해 2003년 재입국한 시노트 신부는 2004년 10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증언한 <1975년 4월 9일>이란 책을 펴내며 여덟명의 죽음을 환기시켰습니다. 결국 2007년 법원의 재심에서 사형됐던 8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명예는 회복되었습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시노트 신부는 우리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 북한 선교를 위해 살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의 함세웅 신부는 고별사를 통해 시노트 신부가 임종의 순간 남긴  유언을 전했습니다. 

“나 지금 하늘나라에 가고 있어요. 여러분들을 만났던 때가 참 좋았어요. 우리 모두 좋은 일을 했어요. 기쁘게 바른 일 했어요. 지학순 주교님께서 아주 큰 일 하셨어요. 교회를 확 바꿔놓으셨어요. 대단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 이렇게 계속 노력합시다." 

 

또 함 신부는 지난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40주년 기념식에서 시노트 신부가 했던 말도 회상했습니다. 평온한 선교생활을 하다가 1974년 박정희 유신 독재때 많은 청년 학생들이 투옥되는 것을 목격하며 세상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던 그의 신앙고백과 인혁당 관계자들의 사형소식 앞에서 더욱 맘 아파하며 진실을 알리는 데 투신했던 그의 삶을 전했습니다.

특히 그가 좋아했던 찬송가 중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결단의 때가 있나니 참과 거짓이 맞설 때 어느 것을 택할 건가?'라는 귀절을 전하며 "동아투위 기자들과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서 애썼던 사람들은 바로 결단했습니다. 선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단과 선택에는 언제나 모험이 따른 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족을 또 직장을, 전 생애를 걸면서 선택했던 아름다운 결단. 때문에 저는 여러분을 존경합니다. 여러분의 결단 때문에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했던 말을 상기시켰습니다. 

유신 독재정권 당시 시노트 신부는 "추기경님 왜 카톨릭은 잠잠합니까? 개신교 목사님들은 투옥되시고 도시산업현장에서 뛰고 계시는데, 성령께서는 개신교에서만 활동하십니까? 가톨릭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라는 편지를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냈고 김 추기경은 시노트 신부를 초청해서 두 시간 넘게 시국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는 일화는 고전처럼 들렸습니다. 

   
▲ 유인태, 이부영 전 국회의원과 이철, 김종철 씨가 장례미사에 참석했다. 이들은 민청학련사건,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 등으로 박정희 유신체제하에서 고난을 받던 도중 제임스 시노트 신부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장례미사에는 동료 선교사들을 비롯해 사제 50여 명과 평신도, 수도자 250여 명이 참석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이어진 장호창 신부(한국외방선교회)의 고별사에서는 임종전 2주간 병원에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이 병문안와서 손을 잡고 '신부님 한국에 와서 저희 위해 많은 수고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 신부님 잊지 않을 겁니다.'라고 하자 의식이 희미하던 시노트 신부는 한국말로 '천만에요, 천만에요' 라는 말을 한 시간 가까이 했다고 합니다. 

또 의식이 또렷하지 않은 중에도 인혁당사건 희생자 여덟명의 이름을 계속 되뇌이며 그들의 고통을 가슴 깊게 새겼으며, 자신을 알고 있는 한국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며 그들을 많이 보고 싶어하고 그리워했다는 말을 전할 때는 장례미사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시간 반에 걸친 장례미사가 끝나고 시노트 신부님 육신은 벽제화장터에서 화장을 마친 후 '참회와 속죄의 성당' 평화의 문(봉안당)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해방전인 1922년 평안도 포교로 이땅에 처음 왔던 메리놀 선교회의 전통을 이어 받은 시노트 신부는 북한 선교와 우리 민족의 화해, 일치, 통일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미술가들이 밑그림을 그리고 북한 미술가들이 중국 단둥에 머물면서 완성했다는 성당 제대의 모자이크로 꾸며진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 맨 처음 봉안되는 가톨릭성직자가 시노트 신부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 장례미사를 마친 제임스 시노트 신부의 운구행렬이 성당을 나서 벽제화장터로 향한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제임스 시노트 신부가 봉안된 평화의 문 봉안소. 이치열 기자 truth710@
 
   
▲ 제임스 시노트 신부와 오랜 인연을 이어온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문정현 신부가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그때처럼 다 잡혀갈 각오로 싸우면 돼 하며 격려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미사가 끝나고, 발길을 오두산 통일전망대로 옮겼습니다. 왼쪽에서 흘러온 한강과 오른쪽에서 흘러온 임진강은 전망대 앞에서 만나 서해로 조용히 흘러가고, 썰물 때여서 두 강이 만나는 곳에 쌓인 삼각주가 그 부드러운 맨살을 드러냈습니다. 청둥오리는 차가운 물 위에서 머리를 날개에 묻고 겨울햇살을 즐기고, 독수리는 남에서 북으로 여유롭게 날아갑니다. 망원경으로 보는 북한의 가정동 마을에는 추위 때문인지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어 텅 빈 마을 같습니다. 

   
▲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한강과 임진강 합수부. 이치열 기자 truth710@
 

이 땅에 사는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그토록 바랬던 푸른 눈의 미국인 선교사의 일생과, 분단 60년 동안 서로를 헐뜯고 싸우고 죽이며 서로를 적대적 공생의 파트너로 삼고 있는 남과 북의 안타까운 현실의 극명한 대조는 가슴을 답답하게 합니다. 성당에서 뜨거워졌던 가슴은 통일전망대에서 순식간에 얼어 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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