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뉴스프리존

한애자의 소설 연재

한애자의 소설 연재

한애자 기자 입력 2016/06/12 22:11
연재 -제1회 빵굽는 여인

한애자의 소설 - 제 1회 <빵굽는 여인> p-102 

 

봄 햇살이 제법 따스하게 비치기 시작하였다. 엊그제 커튼을 새롭게 바꾸고 나니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노인숙은 설레고 기쁜 마음으로 장롱 깊은 곳에서 문서와 통장을 꺼내었다. 그것은 자신의 귀중품이나 보석을 감춰두었다가 남몰래 꺼내보는 그런 스릴과 즐거움이었다. 얼마 전에 대전에 내려갔을 때 남편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간병인을 구하고 당신은 서울로 올라가.”

자신을 귀찮은 존재로 이방인 취급하듯 남편은 힘없이 말하였다. 병간호에 무관심한 것을 알고 애정의 종말을 선언하는 듯하였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난 곁에 있을 권리가 있는 여자예요!”

그러나 그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가느다란 생명의 젖줄기를 탐색하듯 ‘황우석 박사의 사건’을 설명하는 뉴스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것이 성공하였다면 자신이 생존할 수도 있을 거라는 가느다란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뉴스의 내용이 바뀌자, 남편은 간병인이 인터넷을 탐색하여 모은 자료들을 누운 채 검토하였다. 자신과 같이 암 선고를 받은 암환자들의 생명이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뭔가를 찾아내려는 간절함의 모습이었다.

노인숙은 다시 한 번 통장을 들여다보았다. 즉시 은행에 가서 현금으로 인출할 수 있는 억대의 돈이 들어있었다. 남편은 생전에 일산의 논밭을 조금씩 사두었다. 그런데 그곳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면서 땅값은 엄청나게 치솟았다. 그 사실을 안 남편은 아무도 모르게 땅을 처분하여 통장을 가득 채워놓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장래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그 비밀스런 재산목록을 그녀에게 공개한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남편의 사망선고는 노인숙에게 매우 획기적이며 새로운 삶을 열어 주었다. 돈방석에 앉아서,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었다. 이제 두려울 것이 없었다. 모든 일에 자신감을 심어 주었고 마냥 부풀게 하였다.

지난 날 남편과의 생활을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남편이 사들였던 논밭의 재산권의 행사를 자신도 모르게 은밀하게 처리한 걸 보면 이미 자신을 제쳐놓았다는 것과 그녀 또한 얼마나 남편의 일에 무관심하였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왜 그렇게 자신은 남편에게 애정 없이 대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성실하고 고리타분하여서 남편을 도외시했는지 모르지만, 남편이 지겨웠다. 원인은 남편보다는 자신에게 있었다. 마음 한 구석에 그녀는 늘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였다.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줄 낭만과 환상적인 분위기를 갈구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성향은 결국 주말부부의 형태로 바뀌게 하였다. 아마 이때부터 남편의 병이 점점 깊어갔을 것이다. 퇴근 후 남편이 허전하게 홀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노인숙은 서울에서 맛있는 빵을 구우며 도시의 화려한 생활에 만족해하였다.

 

노인숙은 한숨을 돌리고 다시 한 번 커튼을 올려다보았다. 젊고 발랄한 분위기가 넘쳤다. 그리고 장롱의 옷을 모두 꺼내어 폐기처분하기 시작하였다. 여선생의 전형적인 정장 스타일의 옷들, 그리고 남색, 검정색, 갈색, 회색의 옷들……. 모두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동안 왜 그러한 옷을 줄기차게 입고 다녔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빈 장롱에 새로운 패션스타일로, 좀 더 젊게 보이게 하는 캐주얼한신세대풍의 의상으로 채웠다. 청바지나 재킷 그리고 거기에 맞는 액세서리를 사들이느라고 그녀는 연일 분주하였다.

오늘도 창밖으로 건너편 건물 2층에 걸린 자주색 커튼이 보였다. 창밖을 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정경을 보게 된다. 그녀는 습관처럼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커튼 사이로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드리는 듯한 두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언제나 뒷모습만 보였고 목사는 찬송을 하거나 설교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 여자의 등에 까닭 없는 적개심이 끓어올랐다. 그것은 알 수 없는 타인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다시 시선을 옮겨 화장대 위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어제 이태원에서 쇼핑하며 구입한 커다란 귀고리를 달아보았다. 마치 클레오파트라를 연출하려 하는 듯, 젊게 보이는 새로운 변신에 사로 잡혔다.

“크응……. 크응…….”

세리가 꼬리를 흔들면서 다가왔다. 어제 저녁에 우유에 딸기 즙을 넣어 주었더니 아주 잘 먹었다. 세리는 이제 잠에서 깨어났는지 노인숙의 손바닥을 핥아주며 아침인사를 하였다. 노인숙의 다정한 그리고 유일한 친구다. 하지만 그녀는 가을을 유난히 타서인지 마음이 요즘 더욱 스산하고 허전하였다.

돈이 있으면 행복할 줄 알았지만 가슴을 돈으로 채울 수는 없었다. 평소 갖고 싶었던 명품으로 치장하였지만, 소유하면 할수록 그 허전함은 깊어만 갔다. 올가을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야만 무사히 보낼 것만 같았다.

노인숙은 깊은 한숨을 쉬며 장롱에서 청바지를 꺼내 입고 전신거울 앞에 섰다. 전신거울이라서 멋 내기가 편했다. 길쭉한 다리는 청바지에 어울렸다. 여기에 재킷을 걸치고 나니 캐주얼 차림의 삼십대로 보였다. 화장대로 다시 다가가서 이번에 마련한 샤넬의 최고급 향수와 립스틱을 발랐다. 역시 값비싼 것이라서 달랐다. 국산과는 다른 느낌이다. 값비싼 명품과 장신구, 화장품으로 치장하는 생활은 황후와 같은 어떤 프라이드를 느끼게 하였다.

재산이 생긴 후, 그녀는 마음이 들떠 인터넷을 열어 화려한 쇼핑에 몰입하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입지도 않은 옷이 장롱에 쌓여가고 있었다. 모두 한 번도 입어보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면 버렸다. 오직 그녀의 목표는 오십대인 자신의 모습을 삼십대로 변신시키는 일이었다. 그렇게 노력하던 끝에 드디어 삼십대로 보이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뒷모습일 뿐이었다. 언뜻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 삼십대의 여자로 보이지만, 돌아서 보면 역겨울 정도로 차림이 어색하였다. 그 증거로 목의 주름이 나이 든 여자임을 변호하고 있었다.

노인숙은 젊음에 대한 집착이 심해, 몸매 만들기에도 열을 올렸다. 비쩍 마른 몸매인데도 무리하게 다이어트 운동을 했고, 뱃살 빼는 약도 종류별로 복용하였다. 그래서인지 얼굴에 기미와 잡티가 더욱 짙어만 갔다. 피부 미용실에서 수없이 팩을 하였지만 기미는 사라지지 않고 더욱 짙어만 가자, 그녀는 인생의 허무로 슬퍼지기 시작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한애자 haj2010@hanmail.net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