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죄책감과 허무함을 느끼게 만드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쉽게 읽고 싶게 만드는 작품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번역가들과 연출가들의 손을 거쳐 많은 번역본들과 연극작품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원작의 그로테스크함 자체를 무대에 그대로 가져온 극단 이구아구의 연극 <변신>은 원작의 난해함을 오히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 작품은 지난 12일부터 28일까지 대학로 후암스테이지 1관에서 오늘도 매스컴을 달구는 인간실격의 존재들에 대한 논의를 관객들과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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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꼭 읽어야만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품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이 하지 못하는 또 다른 해석을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작품 <변신>을 계기로 원작을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될지도 모른다.
겉모습이 흉측해진 ‘그레고오르’를 보며 나 자신 속 숨어 있던 흉측한 고정관념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바보 같이 변신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을 챙기려는 ‘그레고오르’에게서 어쩔 수 없는 일상을 쳇바퀴처럼 반복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수저 하나 들 힘도 없어 보이던 ‘아버지’가 등에 박힐 정도로 사과를 던지는 모습에서 오히려 ‘그레고오르’의 책임을 물을 런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품어주는 게 당연할 것이라 여겨지던 ‘어머니’조차 아들을 ‘그것’이라 부르는 모습은 그 동안 자신을 희생했던 ‘그레고오르’를 불쌍한 바보라고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듯한 음악학교에 보내주고 싶었던 ‘동생’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 ‘그것’을 죽이자고 말하는 모습은 피로 이어진 가족의 슬픈 실체일지도 모른다.
일하는 사람은 아파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지배인'은 우리 사회의 아픈 모습일는지도 모른다.
작품 <변신> 속 인물들이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느껴질지는 오롯이 관객들의 몫이고 정답은 없을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안광복 저자의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에서는 “샤르트르는 인간 앞에 놓인 극단적인 허무의 현실을 완전한 긍정으로 탈바꿈시켰다” 이야기하며 “나는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책임짐으로써 자신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갈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존재이다”라고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유명한 말에 대해 설명했다. 실존주의는 허무에 관한 철학이 아니다. 카프카 또한 부조리에 가득 찬 사회를 누군가에 기대거나 침묵으로 일관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사회참여의 메시지를 허무를 통해 역설적으로 전달할는지도 모르겠다.
카프카의 고전을 눈앞에서 인물들의 연기를 통해 만나볼 수 있는 연극 <변신>을 통해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사회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해 보는 시간들을 가져보는 것도 더운 여름밤을 색다르게 지새우는 또 다른 휴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