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그 무덥던 지난여름의 푸른 계절은 자취를 감추고 거리의 플라타너스는 어느새 갈색으로 단장하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구청 건물이 산뜻하게 새롭게 변모하고 있었다.
“저게 새로 지어진 구청이래.”
“와! 정말 크고 화려한데요!”
앞서가는 노부부가 새로 지어진 구청을 가리키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구청을 왜 쓸데없이 화려하게 지어서 국민들이 낸 세금을 낭비하고 있냐에 열을 올렸다. 그러다가 한편으론 지역주민을 위한 투자니까 긍정적으로 보고 혜택을 누려야 한다, 옆 건물에 노인전문 요양원이 개설되었는데 그곳에 들어가는 가입 조건 등…… 이야기를 펼친다.
웰빙 시대에 자신을 위해서 투자해야 한다, 노인들이 많은 요즘엔 오래 살아도 노후대비가 없으면 불쌍한 인생이 된다, 돈이 있어야 인간대접 받는다는 등... 약간 뒤떨어진 거리에서 인영은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그들은 제법 학식과 교양을 갖춘, 곱게 늙어가는 노부부처럼 여겨졌다.
남편이 여자의 점퍼 등에 붙은 후드 모자를 다정하게 씌어 준다. 잠시 후 그들은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손을 잡는다. 마치 한 쌍의 원앙새의 다정한 모습이다. 그들은 삶에 대한 의욕이 넘쳤고 마치 갓 결혼한 신혼부부처럼 보였다.
어느덧 사거리에 도착하였다. 차들이 꽤 붐볐고 차도 쪽으로 음식을 배달하는 오토바이가 부르릉거리며 ‘획!’ 앞서 지나갔다. 동시에 넓은 플라타너스 잎이 인영의 얼굴에 부딪혔다. 차가운 플라타너스의 잎이 얼굴과 목을 스치고 발밑에 떨어졌다. 죽은 짐승의 시체와 같은 냄새와 불에 타버려 굳어진 면사포 같은 싸늘한 감촉! 온몸이 싸늘해지고 소름이 끼쳤다.
인영은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 있는 플라타너스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비켜든 늦가을 볕에 어두운 음영이 필름처럼 스쳤다. 절규와 불행의 찰나, 운명적 역사, 어둠의 시작…….
낙엽처럼 떨어져 허무한 존재로 남편은 그렇게 자신으로부터 사라졌다. 어느덧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고 그 액체가 뜨겁게 흘러내렸다. 낙엽이 떨어져서 나뭇가지는 앙상하지만 플라타너스의 나무는 장엄하게 자리를 버티고 서 있었다.
인영은 구청 건물 쪽으로 좀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건널목에 파란색 신호등이 깜박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분홍색 스웨터가 눈에 띄자 통장 아줌마가 떠올랐다. 그녀는 분홍색 스웨터를 즐겨 입었고 언제나 핑크빛 환상처럼 행복해 보였다.
“이것 들고 구청에 한번 가 봐요. 어떻게 해서든 새끼들하고 살아야지!”
오십 줄의 통장 아줌마는 언제나 정감이 가는 이웃이다. 남을 도우면서 사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고 언제나 방긋거렸다. 커다란 눈동자와 후덕한 이마와 볼은 남편을 잘 만난 행복한 여인의 자취가 스쳤다. 그러나 영자보다야 행복할까! 여고시절의 동창인 영자는 행복한 여자의 대명사로 떠오른다.
어느덧 구청에 도착하였다. 건물은 최신식으로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지과의 3층으로 들어갔다. 직원들이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고 있었고 몇 명 사람들이 대기좌석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뒤에는 커다란 어항이 있었고 한 쌍의 금붕어가 이리저리 노닐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이를 임신한 여직원이 내민 서류를 보며 컴퓨터 앞에서 검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볼에 짙게 깔린 기미와 만삭으로 숨까지 가파오르는 듯하였다. 빨간색 체크무늬의 임부복 위에 검정색 니트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피곤해서 그런지 빨리 업무를 마치고자 하는 듯, 조급해 보였다.
“여기 작성해 주세요!”
추천서와 같은 용지를 건넨다.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인영은 인적사항을 간단히 작성하여 내밀고 숨 쉴 때마다 들락날락하는 여직원의 배를 바라보며 대기석의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쌍태입니다.”
임신 5개월에 산부인과 의사의 말이었다. 의외의 상황에 당황했으나 매우 침착하고 태연자약한 태도로 반응하였다.
‘별나게 웬 쌍둥이?’
그것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늦은 결혼에 어렵게 임신하였기 때문이다. 인영은 하늘이 한꺼번에 두 아이를 선물하여 주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양육문제가 어둡게 마음을 짓눌렀다.
“앞으로 긴급 재정시대야. 한 번에 다 치렀으니 좀 힘들어도 나중에는 괜찮아!”
세상에 저런 남자가 다 있을까 할 정도로 그는 늘 긍정적이며 선량하였다. 인영은 남편의 그 선량한 눈매와 삼세판의 굳센 의지가 맘에 들었었다. 그는 구세군에서 불우하게 자라왔고 검정고시를 합격하여 우체국 직원이 되었다. 고향으로 부치는 택배의 짐을 쌀 때, 그는 악의 없이 친절을 베풀었고, 자신과 자주 마주치게 되자 낯이 익었고, 어느 날 엽서가 날아 왔고, 차를 마시고 강변에 거닐다가 어느 한 소설의 여주인공처럼 오직 사랑이라는 것에 목숨을 걸듯 그와 결혼했다고……. 인영은 후에 씁쓸하게 되뇌었다.
남편은 구인 광고란을 열심히 탐색하던 중 생활정보지를 배달하기 시작하였다. 고아로 자라서인지 홀로 외롭게 모든 것을 스스로 처리하는데 익숙해진 그는 하루에 두 가지 일을 하는, 생활력이 강한 남자였다. 인영이 임신을 하게 되자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 두게 되었다.
부지런한 남편은 새벽같이 일어나 어김없이 근처의 도로변과 골목을 돌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비록 몸은 고단하였지만 두 아이의 장래를 준비하는 뿌듯함에 희망차 보였다. 첫 번째 월급을 타는 날에 기저귀를 한 아름 사가지고 왔다. 기쁨에 차서 그날 쌍둥이의 이름을 지었다. 자연의 별과 바다처럼 세상의 큰 존재가 되길 바라면서 ‘별’과 ‘바다’라고 지었다. 그는 아이들 이름을 쓴 봉투에 받은 월급의 절반씩을 나누어 넣었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역사를 써나가야 한다는 뿌리의식에 사로잡혀서인지, 자신을 구세군에 맡기고 홀연히 사라진 어머니를 찾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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