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쉽게 다가서기는 어려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 우리 바로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이야기로 재창작되어진 소리극 <죄와 벌>이 지난 7일부터 18일까지 소극장 산울림에서 관객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소리, 판소리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소리를 작창한 정지혜 소리꾼의 각색과 연출, 이기쁨 연출가의 연극적 요소를 가미시킨 연출은 어울리지 않을 듯 한 고전과 판소리의 영역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멋진 작품 한 편을 만들어냈다.
법대생 선호는 학비가 없어 휴학한다. 방세는 몇 달 씩 밀려 있고 당장의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는 고단한 상황 속에서 악명 높은 ‘다맡겨전당포’ 주인을 눈여겨본다 .착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 죽어 가는데 늙고 사악한 인간은 돈을 움켜쥐고 있는 현실에서 극도의 모순을 느끼고 자신의 세계관 안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끈질기게 고뇌한다.
자기능력과 가족애를 무력하게 만든 가난이라는 현실 안에서 자신을, 인류를 구원하고자 도끼를 집어 들고 전당포를 향한다.
핸드폰이 울리면 경기를 일으키듯 관 속의 지하 단칸방에서 몸을 움츠리던 그때-백 년도 더 된 러시아 젊은이 이야기의 시작점에 지금의 우리가 보였기에 작품을 쓰게 되었다는 정지혜 판소리공장바닥소리 대표이자 배우는 흰 종이에 쓱삭이며 묻어나갔을 연필의 흑탄은 심장 박동처럼 살아있었고, 단 한 명의 인간에게 뿜어 나오는 문장들은 요동치는 소리 그 자체로 느껴졌다고 이야기한다. 그 때 들려오던 그 소리가 조심스레 판을 열어 음을 얹고 걸음을 얹어 판소리라는 우리의 장르와 러시아의 고전소설 <죄와 벌>이 관객들 앞에서 읊어지고 있다.
매 작품마다 진심어린 고뇌와 애정이 느껴지는 작품을 만들고 있는 이기쁨 연출은 어쩌면 현대에는 답답하다 느낄 수도 있는 1800년대 후반 제정러시아의 현실과 배우들을 에둘러 보거나 외면하지 않고 직접 정면으로 마주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에 우뚝 서길 바랐던 한 사람, 법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은 그 사람을 구원한 건 그의 고통도, 그의 도덕심도, 저지른 죄에 내려지는 형벌도 아닌 그저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가진 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며 그의 민낯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세상을 구하는 방법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면, 조금만 더 손을 내밀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는 이기쁨 연출의 행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을 건넨다.
소리극 <죄와 벌>은 배우 정지혜, 김율희, 임종인의 소리과 연기 그리고 고수 정치인, 아쟁연주자 김범식, 베이스연주자 백하형기의 연주는 작품 속 인물들의 마음 속 깊은 생각들에 절절한 흐름을 더해주며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을 안겨주었다.
‘내가언제어디서소리를 어떻게왜’는 시대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판소리를 고민하고 실험하고 있는 단체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다양한 판소리 작법을 통해 단체명 그대로 ‘내가 언제 어디서 소리를 어떻게 왜 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의 과정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들의 고민과 노력은 작품 <죄와 벌>을 통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지고 있다.
- MINI INTERVIEW -
1. 원작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_분리, 분열을 의미하는 raskol_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남성과 여성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다양한 판소리 작법을 통해 한 명인 듯 , 여러 성별을 지닌 다수의 존재인 듯 한 선호라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밖에도 소피아(소냐)가 분리되어 표현된 듯 한 소냐와 준희, 그리고 준희에게서는 판사와 친구의 모습도 겹쳐 보이는 듯 했습니다. 원작 <죄와 벌>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을 분리하거나 합쳐 보이게 만든 소리극 <죄와 벌>속 인물들이 만들어진 과정들이 궁금합니다.
이기쁨 연출 : 방대한 양의 원작을 1시간 30분 분량의 소리극으로 표현해야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원작의 사건과 인물들을 최대한 압축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중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를 선호로 바꾸는 과정 중에 ‘선호’가 가지는 고뇌와 내면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여러 명이 선호를 돌아가면서 또는 동시에 연기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는 1명의 소리꾼이 여러 명, 또는 성별과 나이를 넘나들며 연기하고 노래하는 판소리의 특징에서 착안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선호’라는 인물이 무언가 규정된 틀에 갇히지 않고 하나의 ‘인간’이란 형태로 보였으면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남자, 여자 배우가 상관없이 연기를 하게 되었으며 이름 역시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이름으로 짓게 되었습니다. 텍스트 안에 존재하는 ‘선호’는 여성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긴 하지만, 맡는 배우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보여도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선호의 중심적인 성별을 ‘여성’에 두다보니 원작의 인물들의 성별이 전복되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일어났습니다. 전당포 노파 이바노브나는 늙은 남자 ‘노사장’으로, 소냐는 젊은 남자 ‘준희’로, 소냐의 술주정뱅이 아버지 ‘마르멜라도프’는 엄마 ‘송사장’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물과 사건을 압축하는 과정 안에서 판사 ‘페트로비치’와 라스콜니코프의 동생 두냐의 약혼자 ‘루쥔’, 그리고 두냐를 탐하는 또 다른 남자 ‘스비드리가일로프’를 하나의 인물로 섞어서 구성을 하였습니다. 이런 선택을 하기까지 고민이 많이 되었으나 과감하게 삭제하거나 합치지 않으면 원작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담아내기에 너무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2. 작품 <죄와 벌>은 이제껏 잘 들리지 않는다 여겨 조금은 어렵다 여기던 우리 소리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열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연주와 소리를 보태어 극의 집중도를 높여주던 연주자분들의 악기와 연주도 너무나 인상 깊었습니다. 심장을 울리며 절규하는 듯 한 소리에 힘을 실어주던 북소리, 북과 추임새를 넣는다고 알고 있던 고수 분보다 베이스와 실로폰 연주자분의 추임새(해설과 노래들)도 너무나 독특했고, 클래식 서양악기의 현악기 소리까지 들리는 듯 하던 아쟁연주자분의 우리 현악기들의 연주들 모두 너무나 대단하다 느껴졌습니다. 연주자분들의 간략한 소개와 각기 연주하시던 악기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백하형기 (베이스 외) : 멀티악기 연주자와 연극, 영화음악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는 백하형기입니다. 이번 작품 <죄와 벌>공연에 제가 사용한 악기는 어쿠스틱 베이스, 어쿠스틱 기타, 칼림바, 아이리쉬 휘슬, 공명 실로폰이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는 마이크를 통한 음향 확성을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였고, 더불어 국악기에 보다 잘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전자악기인 일렉베이스보다 어쿠스틱 베이스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금 소리를 대체하기 위하여 음역대가 높은 아이리쉬 휘슬을 선택했고, 꿈속이나 심리를 표현하는 울림을 사용하기 위해 아프리카 악기인 칼림바를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각종 효과음들에 폭넓은 음을 입히기 위해 공명 실로폰을 사용하였습니다.
김범식 (아쟁) : 아쟁 연주자 김범식입니다. 이번 작품 <죄와 벌> 공연에서 대아쟁과 10현 소아쟁을 연주했습니다. 두 악기는 전통음악보다는 창작음악에 주로 사용하는 악기로, 서양음악으로 비교하자면 대아쟁은 첼로의 역할을 하고, 10현 소아쟁은 비올라의 역할을 맡고 있는 악기입니다. <죄와 벌>의 분위기에 맞게 좀 더 클래식한 음계의 음악과 연주 기법으로 연주를 하고자 했는데, 그 때문에 클래식 현악의 느낌이 많이 느껴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치인 (고수) : 이번 작품 <죄와 벌> 공연에서 소리북, 장구, 심벌, 정주, 젬블럭, 차임벨 등의 악기의 연주를 하고 있는 정치인입니다. 극 중에서 장구와 소리북은 크게 두 가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소리와 극의 분위기에 맞는 다양한 장단을 연주하고 있으며, 연주와 함께 하는 추임새로 관객 분들에게 전달을 돕는 전통적인 역할이고, 둘째는 다른 악사 분들과 함께 연주할 때 서양 북(예를 들면 드럼)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정주는 맑은 소리를 내는 악기로, 정주를 쳐서 소리를 내거나 긁어서 내는 울림소리를 통해 극의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다른 음역대의 정주 2개를 사용하여 다른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심벌, 차임벨, 젬블럭 등은 음악을 더 풍성하게 채워주는 조미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3. 공연의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이번 작품의 배우님들이 어떻게 이번 만남을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배우님들이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특별히 힘들었던 점이나 일화들도 듣고 싶습니다.
정지혜 배우 : 이기쁨 연출과는 '경성스케이터', '제비씨의 크리스마스' 등 전작에서 함께 작업을 했던 사이로, 자연스럽게 함께 이번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후배 소리꾼 김율희과 연출님을 통해 소개 받은 임종인 배우가 모이게 되었습니다. 준비를 하면서 힘든 점은 딱히 없었고, 음향 설치를 거치지 않고 (마이크를 통하지 않고) 듣게 되는 소리의 매력을 전하고 싶어서 음향 장비를 따로 준비하지 않고 공연장으로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배우와 악사간의 모니터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힘들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공연 중에 최대한 집중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율희 배우 : 정지혜 배우는 제 대학교 선배에요. 대학교 때부터 인연이 있었고 지금 정지혜 배우가 대표로 있는 ‘판소리공장 바닥소리’라는 팀에서 저도 활동을 했었는데, 그 때 함께 극 작업을 하기도 했고요. 이번 작품 <죄와 벌>에서는 정지혜 배우의 연락을 받고, 그녀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합류하겠다고 했습니다. 임종인 배우는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났고요. 가장 힘들었던 점은 작창이었어요. 작곡가들은 대개 작곡법을 배우고 나서 접근을 하는데, 작창은 그 누구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고, 그저 수십 년간 전통 판소리를 몸으로 익힌 소리꾼이, 새로운 텍스트를 보고 그 안에 흐르는 감정을 읽어내어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리를 만드는 것이거든요. 특히나 수많은, 복잡한 내면이 소용돌이치는 ‘죄와 벌'은 작창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임종인 배우 : '왕복서간 :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이란 작품을 통해서 이기쁨 연출님과 연이 닿아 이번 <죄와 벌>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연출님께서 소리극에 대한 제안을 해주셨을 때 매우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컸지만, 연출님, 음악감독님과 모든 팀원들이 함께 조언과 지도를 해주셔서 여기까지 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로써 한 단계를 성장해나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4. 이기쁨 연출님은 정말 다양한 작품들을 연출하시며 매번 새로움에 도전하고 있으시다 여겨집니다. 그런 연출님의 작품들은 마니아 관객들을 만들어 왔고 계속해서 그런 관객들을 만들어 내고 있으십니다. 작품과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우와 제작진들에 대한 무한한 믿음도 느끼게 만드는 연출님께서 원작 <죄와 벌>에서 어떤 캐릭터에게 가장 깊은 애정을 느끼시는지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기쁨 연출 : 질문에서 기대하는 답변이 아닐 것 같지만, 사실 원작 '죄와 벌'에서는 어떤 캐릭터에서도 애정을 느끼기가 어려웠습니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빠져있는 초인사상이나 거기서 시작된 살인 등, 그 인물의 행동들이 제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었습니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를 설득하여 자수하게 하는 도덕적인 인물이지만, 그녀가 행하는 자기희생, 순종, 그리고 구원으로 이끄는 이미지 또한 개인적으로는 답답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외의 인물들에게도 마음이 동하는 부분이 너무 적었고. 그러다보니 현대적으로 각색하면서 인물들의 성격과 주어진 환경을 새롭게 규정하는 과정은 스스로에게 필수적인 부분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5. 연출님과 배우님들의 차기작이 무엇인지, 간략한 소개도 같이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기쁨 연출 : 8월 30일부터 9월 11일까지 아르코소극장에서 '산책하는 침략자'의 연출을, 9월 6일부터 8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정지혜 배우/연출과 함께 하는 '해녀탐정 홍설록'이라는 공연의 협력연출을, 9월 19일부터 22일까지 예스24 2관에서 '난설' 재공연 연출을, 10월 3일부터 10월 5일까지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에서 '가시리'의 연출을 합니다. 그리고 또.... 11월... 12월........ 작품들이 남아있습니다.
정지혜 배우 : 9월 6일에서 8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해녀독립운동을 담고 있는 이야기 '해녀탐정 홍설록'을 소리판으로 펼칩니다. 저는 배우 겸 연출로 참여합니다.
김율희 배우 : '괴물'이라는 모노소리극(1인 소리극)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셸리 작가의 이야기를 담았고요. 작년에 초연을 한 번 했는데 올해는 정동극장 정동마루에서 9월 26일부터 29일까지 공연을 올립니다.
러시아의 문학을 연극으로 읽는 ‘2019, 산울림 고전극장’은 지난 6월 12일부터 9월 1일까지 소극장 산울림에서 6개의 작품들이 관객들과 만남을 가졌고,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각색/작창한 이번 작품 <죄와 벌>에 이어 고전극장에서 마지막으로 선보이는 영국 작가 존 골즈워디가 19세기 세계 문학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이야기라 말하던 작품 ‘무무, 8.21~9.1, 극단 시선’의 작품 또한 기대가 모아진다. 수준 높은 고전 작품들을 젊고 열정 있는 예술가들의 참신하고 다양한 언어로, 좀 더 쉽게 그리고 보다 감성적으로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는 ‘2019, 산울림 고전극장’은 100권을 목표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