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의 소설-<딱새의 성> 제11회
우리 여고생들은 함께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모두의 감성을 사로잡았다. 레드 버틀러의 그 매력적인 모습에 여고생들은 모두 그의 품에 안기는 환상 속에서 남모르는 로맨스를 간직하고 있었다. 스칼렛의 그 정열적인 아름답고 강한 기질, 애슐리를 끝까지 잊지 못하는 순정, 하지만 우리는 우유부단하고 내성적이며 철학적 기질인 애슐리보다 레드 버틀러를 추켜세웠다. 여성적이고 현모양처인 멜라니처럼 착한 여자보다 우리는 스칼렛 오하라를 자신처럼 여기며 심취되어 보기도 하였다. 아니, 스칼렛은 정열적인 사랑의 여신으로 여고생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영자는 어느 날 인영에게 속삭였다.
“난 애슐리가 멋있어! 바람둥이 버틀러보다. 넌 멜라니 같은 여자야!”
그렇다. 나 서인영은 화려하고 도도한 스칼렛보다 착하고 순리에 따른 멜라니로 살고 싶어 하였는지 모른다.
마침 요 며칠은 별과 바다가 친정에 가 있어 영자의 파티장에 가는 시간은 문제없었다. 혹시 그 파티 장에 연극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참석하여 정의식을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가 마지막 등 뒤에서 내던진 말은 진정 자신의 정곡을 찌르는 심오한 말이었다. 그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 후회스럽고 안타까웠다. 본심은 아니라는 것을 그가 알아주었으면 한다. 어쩌면 연극으로 인하여 그와 계속 인연의 끈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사실 인영은 학창 시절에 꿈꾸었던 연극인의 길을 잠시 보류하듯 접어 두었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진정 하고자 하는 그 일을 하고 싶었다. 그녀는 정의식과의 만남에 설다. 어쩌면 새로운 길이 그 파티장에서 열려질 것 같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다음 날 오후 일곱 시에 영자가 보낸 승용차가 도착하였다. 기사가 영자 편에서 왔다고 정중하게 인사하며 자신에게 문을 열어 차 안으로 들어가도록 권하였다. 낯선 남자와 함께 달리는 차 안은 매우 불안스럽고 황량하였다.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때 무심코 정의식을 불렀다. 웃음이 나왔다. 왜 그의 이름을 불렀을까. 이미 자신을 지켜줄 남자로 각인하였다.
차는 강남 쪽으로 서서히 달리기 시작하였다. 신호등에 정지되어 있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아내를 그리워하며 단란한 가정을 그리워하기보다 일상 속의 권태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제2의 유희를 향하고 있을지 모른다. 서로가 밝혀지기 싫은 한 쌍의 연인처럼 보이는 사람도 보인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져 있고 권태로운 오후의 오락을 찾아 향하는, 반복적인 유희 속에 익숙한 표정들이다.
호텔 주차장은 벌써부터 승용차로 가득차기 시작하였다. 무슨 비밀회의를 개최하려는 듯 분위기가 사뭇 엄숙하게 보였다. 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그들은 호텔 입구에 도착하였다. 곧바로 지하로 통하는 계단으로 향하였다.
운전기사는 입구에 ‘연인들의 초청’이라고 쓰인 곳으로 들어가라고 안내하고 사라졌다. 그곳은 ‘숲 속의 연인들’이라 새겨진 화려한 현수막이 현란하게 반짝거렸다. 인영은 낯선 분위기에 약간의 공포를 느끼며 파티장에 들어섰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무대 전면의 대형 스크린이었다. 영자가 그의 남편과 함께 축배를 선언하였다. 무리는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동시에 경쾌한 춤을 유발하는 음악이 흘렀다. 초대받은 무리는 사십대에서 오십대, 간혹 삼십대도 몇몇 섞여 있었다. 그들은 음악에 맞춰 몸을 흐느적거렸다. 커다란 음악소리에 고막이 울리며 머리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인영은 가능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진 곳의 테이블에 앉았다. 여전히 음악 속에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하였다. 천정에서는 형형색색의 광란의 오색 불빛이 휘황하게 쏟아졌다.
삼십대 가량의 여자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검정색 나시 차림으로 흐느적거린다. 그들은 땀을 흘리며 음악에 심취된 표정으로 온몸을 흔들고 있다.
“춤을 추어야 살이 빠지는 거야. 뭐 헬스를 할 필요 있나. 이렇게 즐기면서 운동도 하고 말이야!”
“맞아. 사십칠 키로는 넘겨선 안 돼.”
“그래야 잘 팔리고 인기가 있잖아!”
옆의 여자도 배꼽이 다 드러난 상태에서 광란하듯 고개와 몸을 휘청거렸다. 한 편의 음악이 끝나자 박수와 환호로 휘파람을 불면서 잠시 사이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