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의 소설-<딱새의 성> 제19회
지난 방탕의 시절에 숱한 여자를 만났었다. 그들은 모두 세속적이며 자신의 육체의 정열의 기운에 사로잡혀 있었다.
불온한 기운들. 가정을 버리고 남편을 버리고 애인을 배신하고 돈과 정욕에 자신을 팔아버린 속된 여자들! 시대에 자신의 존재를 팔아버리는 영혼 없는 여자들!
그들은 생을 얄팍하게 사는 저속한 취미와 문화에 감각 없이 시대의 노예가 되어버린 듯한, 플라스틱 인형 같은 존재들이었다. 오직 현대적 이슈에 일락을 일삼는 모습이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에게 값진 옷과 좋은 집을 선사할 남자를 만나는데 혈안이 되어 사치와 정욕으로 시간과 정열을 쏟고 있었다. 외모 가꾸기에 열을 올리고 돈을 벌어서는 오직 자신의 육체를 위해 허비하며 자신을 상품화하고 있었다.
신상품, 새로운 유행패션, 호화판의 음식 앞에 번뜩이는 눈빛! 부를 과시하며, 미모의 몸짱 만드는 목적이 오직 남자를 유혹하여 쾌락을 탐닉하는 행태들! 자신의 정욕을 채워줄 남자를 사냥하기 위해 번뜩이는 그 정염들!
의식은 이 같은 여인들의 행태에 구역질이 나며 식상하였다. 그들에겐 생에 대한 진지함이나 철학과 가치관, 선악에 대한 분별력이 없이 그저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며 미래가 없는 삶이었다. 정의식은 자신이 비틀거릴 때 무릎 끓고 눈물과 헌신으로 곁에서 지켜주는 여자. 그런 여자를 목말라했다.
그는 몽롱함과 자학 속에 방탕에 자신을 내던지며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가차 없이 버렸다. 그들 중 끝까지 집착하는 여자, 카르멘과 같은 정열적인 여자들. 그것은 여자라는 존재에 더욱더 부정적인 혐오감을 더하여 주었다. 그 숱한 여자와 관계하면서 그는 어느 한 여자의 영혼과도 만나지 못하였다. 그는 정말 순결한 자신의 여자가 그립고 목말랐다.
그러던 중 자신이 찾고 있는 원형적인 여자를 발견하였다. 그 여자를 연극 속에 창조하고 싶었다. 귀엽고 사랑스런 강인한 여자. 바로 서인영이었다. 속되지 않으며 기풍 있고, 품위가 있는 여자였다. 세태에 자신을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은 여자였다.
‘보석같이 반짝이는 사람아!’
의식은 인영만 떠올리면 지난날의 방탕으로 잃었던 남성적 기능이 다시 살아나며 그 상처가 치유되는 듯하였다. 인영은 그에게 부활이었다.
그는 모처럼 하염없이 걸었다. 을지로를 지나 명동의 거리를 계속 거닐며 마네킹에 걸쳐 있는 하늘색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인영을 만났을 때 오래된 초록색 원피스 차림이었다. 그때 그녀의 모습은 옷만 초라할 뿐 빛나고 있었다. 이제 하늘색 무늬로 수놓은 옷을 입히고 싶었다. 이 원피스가 매우 어울릴 것 같았다. 하늘색 원단으로 장미꽃이 수놓아져 매우 고급스러워 보였다. 샵 안에 있던 여점원이 고개를 내밀고 밖을 내다보았다.
“들어오셔서 보시죠.”
“이 원피스 사이즈가 몇입니까?”
“55사이즈입니다. 아주 고급스런 디테일이죠. 사모님에게 선물하시게요?”
의식은 그녀의 몸매와 사이즈를 떠올려 보았다. 자기보다 작고 살이 없는 듯 적당하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면 55사이즈가 맞겠어요!”
그는 값이 좀 비쌌지만 인영에게 입히는 기쁨을 안고 값을 치르고 거리에 나왔다.
의식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산호’라는 카페로 들어갔다. 친구와 두 세 번인가 들렀던 곳이다. 규희가 그를 맞았다.
“어머! 정 선생님, 웬일이세요?”
안에는 손님이 한두 사람뿐이었다. 의식은 인영과 동창이라던 이 여인에게도 친근감을 느꼈다. 파티 기획실장인 자신의 벗과 비교적 친하게 지내는 여인이고 자신을 인영에게 소개하였다. 붉은색 숄을 걸치고 진한 오렌지 빛 립스틱을 칠한 규희의 입술이 반짝였다.
“인영 씨, 많이 힘드나요?”
“아니, 어떻게……. 그럼 계속 만났었나요?”
규희는 파티 홀에서 의식의 눈빛이 인영에게 떠나지 않았던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연극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어머? 인영이 학교 다닐 때, 연기자 끼가 있었어요, 어떻게 알았죠?”
규희는 그가 인영을 사랑하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잠시 침묵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생일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아, 생일 선물하려고요!”
의식은 규희로부터 그녀의 생일을 알았다.
11월 10일!
아직 지나지 않고 다음 주라 다행으로 여기며 그는 맥주 한 잔을 더 마시고 카페에서 나왔다.
곧 명동성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사시간인지 고요한 성음악과 예배의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녔던 이곳에 낯선 사람이 되어 성당의 한쪽에 앉았다.
‘인영의 마음을 저에게 주시옵소서!’
자신답지 않게 그는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키리에…….’
롯시니의 성 음악이 성가대에서 잔잔히 울렸다. 자신의 간절함이 그 미사음악에 스며드는 듯하였다. 성당 안의 사람들이 눈을 감고 기도문을 외울 때 그는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성당 뜰의 마리아상이 밤하늘에 반짝였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랑을 창조하였다고 되뇌며 곧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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