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의 소설- <딱새의 성> 제23회
창밖의 공기는 이슬을 머금고 가랑비가 내린다. 영자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팸플릿을 집어 들었다. 현관 출입구의 편지함에서 집어든 것을 잠깐 화장대 위에 놓아두었던 것이다.
‘거꾸로 어떻게 살 수 있나요? 거꾸로 사람을 매달으면 숨이 막히잖아요. 그러나 멋진 딴 세상이 보이거든요!’
영자는 팸플릿의 머리말에 정의식 감독의 인사말을 읽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문화계에서 상당히 이름이 난 명사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최근에 인영과 만난다는 소식을 규희로부터 잠깐 들었었다.
“사람이 좀 점잖고 진실해보였어. 전번에 파티 때 인영이를 잠깐 소개하였는데 호감을 보였거든. 세상과 거리가 먼, 좀
맹한 점이 서로 닮았어. 뭐라고 할까. 순수파? 아무튼 인영이 하고 잘됐으면 좋겠어!”
표지에는 인영이 화려한 왕관을 쓰고 자주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감독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움푹 팬 보조개가 더욱 귀엽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 연극의 주인공이었다. 약간 놀란 영자는 학창시절에 연극부에서 활동하던 인영이 떠올랐다.
‘학교 다닐 때부터 끼가 있었지.’
언제나 이슬과 같은 영롱한 친구였다.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수준 있고 언제나 지혜롭고 의젓하였다. 동창이지만 오히려 언니 같은 위엄과 품위가 있었다. 사실 인영의 불행을 위로하고 싶어 별장일과 파티 안내원의 일을 시켰지만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어쩌면 자신의 타락을 지켜보고 실망하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인영 앞에 서면 왠지 두려웠다. 어떤 의로운 광채의 위엄에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졌다. 이제 신데렐라가 된 인영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는 여왕처럼 왕관이 씌어졌고 눈동자는 샛별처럼 빛났다. 정말 신비로웠다.
“인영은 내가 이렇게 우울증과 고독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모를 거야. 늘 나를 부러워하며 곁에서 추켜세워 주었던 너, 자랑스러운 인물이 되어야 하는데. 아!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 들었나! 나는 벌레! 벌레! 하하핫핫! …… 난 너를 내 곁에 두고 싶었어. 왠지 알아? 그 옛날처럼 너에게 추켜세움을 받는 나의 모습을 상기하고 싶었지. 황후처럼 너에겐 중요한 의미가 되고 싶었어!”
영자는 허파에 바람이 든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깔깔거렸다. 그리고 소주를 또 한잔 들이켰다.
“인영아, 영자가……, 영자가……, 으흑흑흑!”
인영을 곁에 둔 근본을 냉정히 분석하였다. 자신은 첫 남자의 아이인 핏덩이를 버렸다. 그와 헤어진 후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모든 비참함을 아이와 함께 지워버렸다. 인영은 친구들이 쌍둥이를 고아원에 맡기고 새 출발하라고 속삭여도 흔들리지 않았다. 진실함과 미모를 겸비한 인영이었다.
그 힘에 겨운 불행 속에서도 꿋꿋하게 새끼들과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모습은 강한 생명력과 위엄이 느껴졌다. 수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끝까지 지키며 살아가는 인영이 존경스럽기까지 하였다.
영자는 취하여 비틀거리며 절망감이 밀려왔다. 허무하고 벌레 같은 삶을 증오하며 아파트 베란다로 향하였다. 더 이상 이렇게 비루하게 연극하듯 살고 싶지 않았다. 죽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영자는 베란다 난간을 딛고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영자의 머릿속에 팸플릿 위의 인영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죽으면 안 돼, 넌 언제나 최고였잖아!”
자신을 꾸짖듯 하는 황후의 냉엄한 표정에 움찔하였다. 영자는 천천히 비틀거리며 깊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 쓰러졌다. 현기증과 함께 왕관을 쓴 인영의 환영에 사로잡혀 의식이 몽롱하였다.
베란다 쪽의 창 밖에선 어느덧 커다란 빗방울이 들이쳤다. 온 세상이 캄캄하였다. 아파트 옥상에서 갑자기 ‘획’ 하며 커다란 물체가 떨어지며 창밖을 스쳤다. 잠시 후 밖에선 요란스런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영자는 비몽사몽간에 잠이 들었다. 밤은 음산하게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