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자 장편소설 [모델하우스]제14회
자각
애춘은 정세원에게 확 달려들었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그것은 스토커처럼 달려드는 애춘에게 정세원은 성실하게 자연스럽게 인격적으로 대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그런 행동은 애춘에게 자존감을 일깨워 주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남편과 정세원의 친구를 통하여 채성과의 결혼 상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는 것쯤은 애춘도 미루어 알고는 있었다. 생각하면 지난날 자신은 남성에겐 무분별하게 집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 많은 사모님이라는 것을 무기로 삼고 남선생을 불러 들여 맛있는 요리와 고급술을 넉넉하게 대접하는 장애춘은 그들에게 물주이자 여왕이었다. 그곳에서 요리와 술을 즐긴 그들은 애춘의〈남성 그리움증〉을 파악하고 적절한 배우의 역할을 하며 분위기를 메이커해 주었다.
“매력적이야. 남자깨나 울렸겠어!”
애춘을 추켜세워 주면서 속으로는 그녀를 희롱했다.
‘화냥 끼 있는 년!’
저희들끼리는 모이면 노골적인 언어로 그렇게 경멸했다. 애춘은 그런 그들의 분위기를 알면서도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반성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세원은 남들이 비웃는 자신에 대해 진심어린 인격으로 대해 주었다.
‘이제 그만 방황하시죠! 남편과 해결하셔야죠!’
라고 암시하는 듯했다.
정세원이 자신과 정반대 기질의 지선과 같은 여인을 좋아할 거라고 짐작은 했다. 항상 그의 표정을 늘 지켜보는 키퍼가 되어서인지 그의 눈은 언제나 민지선을 향해 더듬고 있었다. 그는 숭고하게 우아하고 지적인 지선을 늘 먼데서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더욱이 지선은 여성으로서 원숙미까지 겸비했다. 그것은 겉과 속이 무르익은 늦가을의 풍성한 과실과도 같았다. 정세원은 지선이 근무하는 교무실에 자주 들렀다. 업무 차 볼일이 있어 갈 때도 있었지만 지선이 보고 싶어 들른 적도 많았다. 지선의 모습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그 한결같음이 그의 마음을 더욱 끌게 했다. 그녀는 늘 규칙적이며 삶의 질서가 있었다. 늘 정시에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하고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 늦은 시간에 퇴근하고 있었다. 그 시간에 그녀는 독서를 하는 듯했다. 독서수준도 상당히 높아 보였다. 고전과 철학서, 역사서, 자서전 등을 주로 탐독하고 있었다. 사색적인 독서하는 모습은 언제나 한결 같았고 그것은 일편단심의 기질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용모와 옷맵시도 자신이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윤기 있고 탄력 있는 단발머리는 지성미를 더해 주었다. 그 머리가 길어질 때면 하얀 눈이 내릴 때쯤이었다. 그럴 때면 새로운 이미지로 그녀는 길어진 머리를 틀어올려 마치 동양미의 극치인 서시처럼 단아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그 우아한 헤어스타일에 그녀는 언제나 보라색 니트 정장을 진주 목걸이와 귀고리 세트로 조화를 이룬 우아한 모습이었다.
정세원은 그러한 민지선의 모습이 다른 동료교사들보다 단연코 돋보이는 군계일학으로 여겨졌다. 자존감이 높은 여교사들은 민지선 때문에 자신들이 평가절하 되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민지선을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대했고 민지선 때문에 자신들의 존재가 가려지고 있다는 일종의 피해의식을 가졌다. 그들이 민지선을 소외시키려는 분위기였을 때, 그녀는 늘 사자와 같은 어떤 당당한 위엄이 어려 있어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양을 떨지도 않았다. 지선은 결코 어느 누구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았다.
정세원에게 민지선의 아름다움이 예민하게 감각화 되었다. 지선에 대한 그의 연모하는 감정은 잔잔하게 사랑의 반주곡이 되어 울리고 있었다. 그것은 음란하다기보다는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마치 담 밑의 이름 모를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으면 꺾어서 향기 맡고 싶어 하는 그런 심리였다.
헤어진 지가 이십 년이 지났지만 정세원의 가슴 속에는 아직도 한 여인의 영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에게 처음으로 감격적인 사랑의 도취에 빠져 들게 한 여자! 어느 날 매스컴을 통해 그녀의 귀국 소식을 접했다. 그 첫사랑의 여인은 국제적인 무용수가 되어 돌아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용과 3학년이었고 마른체격의 가냘픈 몸매를 가진 미인이었다. 그것은 무용하기에 알맞은 체격조건이었다. 체육과와 무용과와 관련된 활동을 할 때, 스치듯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첫눈에 사랑의 화살을 맞았던 것이다. 그 미모의 무용수가 어느 재벌의 외척과 열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절망 가운데 패배감을 안고 첫사랑의 아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녀는 재벌 사업가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었으며 화려한 무용계의 신데렐라가 되었다. 그는 자신과 그녀의 일 년 동안의 교제를 추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