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 신동엽 시인 50주기 기념 공연을 맞아, 한일굴욕회담 반대운동을 펼치며 ‘껍데기는 가라’를 외쳤던 시인의 정신을 기리는 자리를 가지는 연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이 지난 10월 1일부터 6일까지 대학로 공유소극장에서 ‘좋은희곡읽기모임’의 배우들과 함께 수많은 신동엽들이 살아나기를 바라며 그 분을 회고하고 그리워하는 가을을 함께 만들어 나갔다.
전쟁 중 어느 봄날의 대낮, 치열한 육박전이 휩쓸고 지나간 산중 계곡. 포탄에 맞아 처참하게 부러져 나간 고목이 한 그루 서 있고, 남은 가지 하나가 창살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는 곳에서 예기치 않게 두 남녀가 조우한다. 이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의 둘은 뜻밖의 적이 돼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달아나라고 얘기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포로로 잡아야 자기 부대로 복귀할 명분이 생긴다. 부상병으로 만난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둘은 끝내 골짜기를 벗어나려고 동굴로 향하지만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비행기의 기관포탄을 맞고 죽음을 맞이한다.
시극은 시와 극이 혼합된 장르이다. 신동엽 시인은 거대한 역사와 민족의 지향에 관한 문제를 세속적인 산문 형식이 아닌, 보다 웅혼한 시의 형식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이 작품에서 ‘그늘’은 시적 모호함으로 상징성을 드러낸다. ‘그늘’의 의미는 이중적인데, 일차적으로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고 시원한 바람을 안겨주는, ‘편안함’, ‘안식’ 등을 의미하는 평화의 공간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맹목적인 조직들이 드리운 음울한 ‘그늘’로서 동굴로 피신해야 하는 위험한 공간이다.
‘껍데기는 가라’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시를 남긴 신동엽 시인은 4.19혁명을 노래했다 하여 ‘4월의 시인’이라고도 하고, 한국 참여문학의 선봉이라 하여 ‘남한 최초의 저항시인’이라고도 불린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동학농민혁명을 형상화한 서사시 ‘금강’을 써서 문호근 연출 가극 ‘금강’으로 서울 공연과 평양 공연을 한 작품의 원작자로 문학을 책이 아니라 무대로 끌고 나온 장르 개척자이기도 하다.
ー MINI INTERVIEW -
1.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를 가라'는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시구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시'에 대한 추억과 로망은 조금은 예전과는 달라진 듯합니다. ‘좋은희곡읽기모임’은, 훌륭하지만 세상과 조우하지 못한 여러 희곡들을 멋진 작품으로 내어 놓고 있습니다. 신동엽 시인의 희곡 <그 입술에 파인 그늘>, 시를 흔히 접하기 힘들어진 듯 한 요즘 세상에 어떻게 내어놓을지, 시의 낭송과 연극적 장면의 조화들에 어떠한 고민이 있었을지 궁금합니다.
장용철 연출 ;
신동엽 시인의 그 강렬하고 뜨거운 시와 신동엽 시인의 희곡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을 어떻게 조화롭게 섞어볼까? 하는 게 가장 첫 번째 고민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자료를 찾아보니, 신동엽 시인은 1963년에 만들어진 <시극동인회>의 시극운동에 참여하였어요. 시극동인회의 시극운동이 무엇일까? 그 자료가 더 있으면 좋으련만. 시극운동이라 함은 또 무엇일까요? 시인의 말을 통해서 이 세상을 노래하고자함이 아니었을까요?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과 신동엽 시인의 시 11편은 그래서, 21세기에 젊은 배우들과 함께 꿈꾸어보는 ‘제2의 시극운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극 속에는 아주 강렬하게 살아있는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그리고 신동엽 시인이 생명을 불어넣은 그 인물들은 마치 신동엽 시인이 지금도 살아서 외치듯이 ‘시인의 말’을 탄생시킵니다. 그 시절의 풍경이 절로 그려집니다. 전쟁터에서 조우한 부상당한 두 사람(군인)의 좌절된 의지와 마음, 그 눈빛, 멀리서 들려오는 포탄소리, 가깝게 들리는 새소리, 물소리. 진달래꽃, 바위. 이지러진 탄환. 나무와 숲. 괴상한 노인과 고향마을의 풍경들. 전쟁에 나갔다가 한 쪽 팔이 없어진 상태로 마을을 쏘다니는 의식이. 군에 간 오빠를 기다리는 향이와 수자.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사그라드는 두 사람.
시를 낭송하는 사람들을 오른쪽에 배치하고, 극이 펼쳐지는 장면을 왼쪽으로 하고, 무대 안쪽에 어두운 그늘, 어둠의 방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좋은희곡읽기모임에서 펼치는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이렇게 세 개의 시공간이 어우러지는 그림입니다.
신동엽 시인은 그 모오든 쇠붙이, 껍데기를 모두 다 가라! 고 외쳤습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송의동 배우 ;
신동엽시인의 시대적 배경은 선조들의 많은 희생으로 이룬 지금 이 시대에서 편히 살고 있는 우리가 가슴으로 느끼기엔 어려움이 있는 것이 자명합니다. 그들의 영혼과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하고자 노력했고 절실히 느껴 보려 노력했습니다. 이 땅의 전쟁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예술인으로서 잘 전파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느껴지는 만큼 고스란히 관객 분들께 느껴지길 바라며 고민했습니다.
김서정 배우 ;
연출님과 배우들 모두의 첫 번째 고민은 듣는 사람에게 잘 와 닿을 수 있는 표현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다양한 방법들을 생각했지만 극장의 규모와 현실적 여건들을 고려했을 때, 시와 극 상황을 조금 분리시켜 시의 무게감과 극 속의 상황에 무게감이 관객을 너무 짓누르지 않도록
분위기를 계속 환기시키려 했습니다. 성공했을는지는... 하하
정해린 배우 ;
한 명의 인물, 그리고 한 명의 낭독자로 드라마를 이끄는 인물들과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시의 낭송이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들렸으면 좋겠다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한 자리에서 그 인물들을 보고 듣고 한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처럼요.
박해란 배우 ;
작업 초기에 여러 번 대본을 리딩하면서, 시가 극 중에 갑작스럽게 들어가게 되면 어색해짐을 느꼈습니다. 결국 극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시와 극의 흐름에 어울리는 시를 분리하고 극 중 등장에 어려움이 따르는 부분은 따로 낭독하는 것으로 결정 지어졌습니다.
이태호 배우 ;
시가 주는 힘과 색깔이 있어, 공연, 희곡 속에 존재하는 대사에도 그 영향을 받아 분석을 두 번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원본에 충실히 리서치를 하고 이해하려 노력했고, 그 다음엔 대사와 장면이 시와 어떻게 어우러져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분석하고 준비를 했습니다.
2. 저항시인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진 신동엽 시인은 그의 부인 인병선 여사의 지극한 이해와 사랑이 그를 지지해 주었기에 우리 앞에 알려질 수 있었다 전해집니다. 개인적으로 좋은희곡읽기모임의 색깔로 인병선 여사의 이야기도 그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금전적으로 정기적인 수입을 얻기 힘든 예술 활동을 계속해나가기 위해서는 주변의 도움들이 있고 없고도 많은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연출님과 배우님들은 예술 활동에 주변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을지,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장용철 연출 ;
정말 어렵고, 힘든 질문이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저는 주변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역시나, 주위 사람들의 믿음과 그들의 응원.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릴 때, 삼삼오오 모여서 먹걸리잔을 들어 보일 수 있는 예술동지들이 늘 곁에 있어 줍니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요?
외로운 싸움이란, 아마도 경제적인 문제일 텐데. 괜찮아요. 견딜 만 합니다. 우리 창작하는 사람들의 외로운 싸움은요. 우리가 다 죽어야 끝이 날 것입니다.
송의동 배우 ;
저의 큰 힘은 아내와 가족입니다. 그들의 응원 ,그들의 기도만으로도 희망과 감사를 느끼며 자신 있게 구상하고 표현하려합니다. 수입이 없고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저의 연기를 믿어주는 아내와 가족만으로도 기운 날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표현을 한번이라도 보아준다면 그것만으로 감사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가치를 정의해봅니다.
김서정 배우 ;
이번 작품은 신동엽기념사업회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아 하게 됐는데 지원금이 어느 정도 있다 해도 역시나 정말 최소비용들만 충당되고 예산을 넘기지 않으려고 매순간 선택을 해야만 했었습니다. 이번 공연팀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모든 예술가들이 가난(금전적, 상황적)과 외롭게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주고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정해린 배우 ;
좋희모 식구들의 관심이 늘 힘이 됩니다. 그리고 같이 작품을 했던 동료들 속에서 생겨나는 마음이 의지할 곳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용석 배우 ;
‘주변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라는 부분에서는 늦게 시작한 저로서는 많은 지지를 받진 못했습니다. 하던 걸 놓아버리고 뒤늦게 26살쯤 시작해서 지금까지 연기하다 돈 없으면 알바하고 이렇게 반복된 게 5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하던 걸 놓아버리고 시작할 때는 도전하는 거에 박수를 받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실상은 그렇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집안에서의 반대, 친구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잘 하던 게 있는데 굳이 왜 힘든 길을 가는지 모르겠다고’, 저는 그래서 더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어느새 막상 무언가를 도전하려면 많은걸 포기해야 하는 나이가 되다보니, 뒤 돌아보니 도전하는 용기보다 오랜 세월을 투자한 일과 주변 사람들을 포기하는 게 더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하고 있는 것에 너무나 행복하고 좋으니 뭔가 보상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때론 혼자 있거나 물질적인 것이나 무언가가 눈앞에 다가오는 느낌이 들면 또 현실과 하고싶은것과 많은 타협을 하게 될 수밖에 없긴 합니다. 외로운 싸움...맞죠. 외로운 것...많이 외롭습니다, 외롭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과 모여 있을 땐 외롭지 않은데...나를 다르게 보는 세상에 맞닿을 때는 정말 외롭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행복은 한데..책임질 것들은 늘어나고...뭐 그냥 그렇습니다. 연기하다 돈 떨어지면 알바하고 돈 생기면 연기하고 이런 삶이죠.
박해란 배우 ;
예술 활동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현재는 다른 일을 같이 할 수밖에 없어요. 언젠간 이것만으로 살아갈 수 있길 바랄뿐입니다.
다행히 주위사람들의 응원이 함께하기에 행복이 더 큽니다.
이태호 배우 ;
일단 인병선 여사님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영광의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말 어렵고, 힘든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한국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의 응원을 너무나 받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어려운 상황입니다. 저희 가족들은 멀리서 지지하기 보다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면 됐다고는 합니다. 걱정이 늘 많은 가족들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사실 전 한국에 와서 연극을 시작하면서 주변 선배님들, 동료들, 후배들 그리고 누나들, 형들, 친구들의 서포트와 사랑을 너무 많이 받고 있어서, 전 분명히 신이 정말 많이 사랑하는 놈이라 늘 생각합니다.
3. 연출님과 배우님들의 차기작이 궁금합니다.
장용철 연출 ; 저는 2019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참가하는 ‘극공작소 마방진’의 역작, '낙타상자'에 출연합니다.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합니다. 지금 연습중이죠. 기대할 만 합니다. 응원 해주세요!
송의동 배우 ; 저는 추상화를 그리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연기로서의 차기작은 없지만, 이번 작품이 끝나면 신동엽시인과의 조우를 캔버스에 담아보려 합니다.
김서정 배우 ; 우선은 쉴 생각입니다.
정해린 배우 ; 극단 마삐따와 영상 협업이 예정이고, 시극의 끝이 지나가는 시간 동안 개인 정비 시간을 더 가지고자 합니다.
이용석 배우 ; 아직 예정된 차기작은 없는 관계로, ,열심히 프로필을 돌리고 오디션 보고 다닐 예정입니다.
박해란 배우 ; 다음 작품은 아직 미정입니다.
이태호 배우 ; 아쉽게도 공연 후 계획은 아직 없습니다.
2019년은 신동엽 시인이 죽은 지 50년이 되는 해이고,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남북미 정상 판문점 회동, 한일 역사, 경제, 안보 갈등이 뜨겁게 뒤엉긴 해이다. 신동엽 시인의 저항정신은 계속 기려지고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작품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시와 극이 혼합된 장르로서 전체적으로 모호성과 상징성이 풍부하고 시정신이 충만하며, 치환 은유적 표현들이 곳곳에서 구사되고 있어서 작가의 염원을 상징적,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추모되는 기억이 아니라 살아 격돌하는 현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