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 현대인의 소외되고 고독한 삶을 그리며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에드워드 올비의 작품 <동물원 이야기>가 지난 9월 26일부터 10월 6일까지 대학로 성균 소극장에서 누군가에게 절실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것조차 제대로 허락되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이 투영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뉴욕의 센트럴 파크 안, 어느 벤치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벤치를 차지하고 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는 피터에게 제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말을 건넨다. 피터는 출판사의 간부로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앵무새와 고양이를 키우며 사회적인 모든 평범함과 행복의 조건에 순응하며 자신이 그 행복의 틀 속에 안전하다고 믿는 소시민이다. 제리는 ‘동물원에 갔다 왔어요’라는 말로 피터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피터에게는 떠돌이 부랑아처럼 보이는 제리의 말에는 관심이 없다. 같은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지만 피터는 제리의 접근을 피하려고만 한다. 제리는 피터에게 계속 말을 걸면서 오늘밤이나 내일 TV나 신문에서 기사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제리는 자신의 불행한 가족사와 자기의 현재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내가 겪어보니까 너무 친절하기만 하다거나 또는 너무 잔인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안 이루어져. 결국 이 둘은 적당히 섞여야 하는 거지.”
“여기 이렇게 한적한 거 보이시죠? 난 여기 누가 나 말고 앉아 있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여긴 언제나! 내 자리였다구요!”
미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의 첫 작품, 연극 <동물원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간의 진정한 교류, 대화의 단절에서 오는 실의와 허무감, 삶에의 의욕상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로부터, 개인으로부터의 단절과 소외감에 대해 현실을 인식하도록 촉구하고 있으며 단순히 현실 인식의 단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진실 된 관계를 가지기 위한 방법 또한 제시하고 있는 부조리극으로 1959년 독일에서 초연 후, 1960년 뉴욕에서 상연하여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었으며, 에드워드 올비는 해당 작품으로 버넌 라이스 기념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1973년 초연 이후, 최근까지도 활발히 공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아직도 잘 모르겠나본데, 다시 한 번 얘기 해줄까? 지금 너의 그 소중한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나’고, 다시는 여기에 앉지 못할 사람은 바로 ‘너’야.”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배경으로 거대한 도시의 복잡한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을 해부함으로써 무엇이 진정한 인간적인 삶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회는 거대한 동물원이다. 고독한 자유통행권을 얻은 현대인의 삶은 동물원처럼 쇠창살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러한 깨달음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 작품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쇠창살을 거둘 사람 역시 인간이다. 어떻게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서울예술실용전문학교와 연극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공상집단뚱딴지의 문삼화 대표가 연출을 맡고, 조하석, 윤관우 배우가 무대를 열정으로 가득 채우며 작품의 긴장감을 한껏 날세웠다.
- MINI INTERVIEW -
1. 전에 마주했던 올비의 ‘염소, 혹은 실비아는 누구인가’를 살짜기 기대하고 갔다가, 아멜리아 노통브의 ‘적의 화장법’을 마주하고 온 듯합니다. 제리는 장문의 대사들을 피터에게 계속하지만, 제리와 피터는 대화를 나눈다기보다는 제리의 독백이나 방백 같다 느껴졌고, 대화의 내용은 왜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들어줘야 하는 지까지의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로움과 소외 속에서 동물적 본능을 이야기하는 작품 <동물원 이야기>에서 원작의 번역과 작품화 과정에서 가장 중시한 부분들을 듣고 싶습니다.
윤관우 배우 ;
‘소통의 의미 그리고 반대로 불통이란 무엇일까?’라는 부분이 우리 모두 동의하며 가장 중시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선 이 작품은 참 불친절합니다. 거칠다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작품이 올비의 첫 작품이었고, 왜 불편하고 거친지가 이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올비의 생애 자체가 그러했고 처녀작이기에 그러한 올비의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느꼈던 주제가 ‘불통’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불통 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예나 지금이나)들의 무지 혹은 착각 속에 살며 인간성의 상실을 이야기 하려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조하석 배우 ;
지금 여기 무대에서 ‘제리와 피터가 만났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 공원에서 서로 다른 인간이 만나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서로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실존하고 있지만 이들의 대화는 일방적이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되어지지 않으면서 끝까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공간에서 밀어 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소통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리가 경험으로 깨달았던 소통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키고 이해 받을 수 있게 인간의 실존의 문제를 고민하고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2. 방대한 대사와 의미는 부유하며, 갑자기 결론으로 치닫는다고까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 <동물원 이야기>에서 제리와 피터의 인물 서사 설정 과정들이 궁금합니다.
윤관우 배우 ;
소통하고 싶은 인간과 소통과 단절된 인간의 만남. 피터는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들 대부분이 살아가다보면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잊거나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소통’이 아닐까요? 그 후자들의 삶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고 그 대부분의 사람들(대기업, 엔터테인먼트 사업 종사자들) 같은 인물들의 겉으로는 완전해 보이지만 언제 부러질지 모를 불안감에 떠는 내면의 모습들에 대한 설정이 있었습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잭 니콜슨과 ‘레인맨’의 톰 크루즈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조하석 배우 ;
제리의 인물설정은 초반에는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배우 하석은 이전 연습에 캐릭터가 정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한 새로운 문삼화 연출님의 번역본에 새로운 분석의 인물 전환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우연인지 행운인지 모르는 첫 대본 없이 하는 연습 중에 피터를 이 공간 안에 두기 위해서는 매우 유쾌할 것 같다는 목표로 즉흥적 연기를 했는데, 매우 좋은 교감과 동기부여를 갖게 되었습니다. 곧 제리의 인물과 내면의 역사가 슬프지만 유쾌하고 싶은 광대로 가는 것이 어쩠게냐고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동의했습니다. 여기서 부터 새로운 제리의 인물이 나왔다고 봅니다. 그 때 배우 로빈 윌리엄스 같은 롤모델이 떠오른다고 해서 방향을 조금은 조커 같은 광대로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준비하는 기간에는 사실적으로 ‘에드워드 올비’의 지문과 글에 충실히 했다면 이번은 부조리 하고, 역설적인 연출의 의도가 충분히 고려되어서 인물과 서사가 구축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외로운 데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상대를 이해 시킬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이 무척 우리 현실의 삶처럼 실존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물원이야기’의 극은 더 흥미롭고 아이러니하고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의 한 단면인 것 같아 매 순간 제리가 살아 있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인물의 서사를 정리해 봅니다.
3. 배우님들의 차기작들이 궁금합니다.
윤관우 배우 ; 현재 ‘유령을 잡아라’라는 드라마 막바지를 촬영 중입니다. 연극 계획은 지금 이 <동물원 이야기>를 더 발전시켜 서울 뿐 아니라 지방에도 홍보하고 올릴 계획에 있습니다.
조하석 배우 ; 저는 내년 영화 준비가 프리프러덕션이 진행되었습니다. 연극은 정말 하고 싶은 작품이 있는데 기획을 진행해 봐야 알 듯합니다. 끝으로 흔쾌히 승낙해 준 문삼화 연출님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난 책임을 진다는 게 뭔지 매우 잘 알고 있는 바람직한 성인이야.
이건 나의 벤치고, 당신이 나한테서 이걸 뺏어갈 권리는 없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자신만의 울타리를 만들어 그 속에서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깨달음을 얻게 되고 그러한 깨달음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작품<동물원 이야기>는 우리에게 계속 대화를 건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