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 가족 구성원이 지적 장애를 겪고 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갈등과 애증의 양상을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하게 그려내며, 장애를 바라보는 가족과 사회의 시선 그리고 희생과 사랑을 보여주는 연극 <앙상블>이 지난 9월 18일부터 10월 20일까지 산울림 소극장에서 우리 모두에게 잊고 살았던 소중한 가치를 되돌아보는 귀한 시간을 선사하고 있다.
모자(母子)가 사는 작은 아파트. 30대 청년인 미켈레는 아이의 지능에서 지적 성장이 멈춘 장애를 갖고 있다. 아들을 혼자 돌보는 이자벨라의 삶은 힘겹지만, 둘 사이의 끈끈한 유대는 고단한 일상을 버티는 유일한 힘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온통 오빠에게만 관심을 쏟는 엄마에 대한 원망과 남들과 다른 오빠 때문에 집을 떠났던 산드라가 10년 만에 나타나 갑작스럽게 결혼 소식을 알린다.
오랜만의 재회가 반갑고도 어색한 세 사람. 그러나 갈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되풀이된다. 오빠를 특수 시설에 보내는 게 모두를 위해 좋은 결정이라고 엄마를 설득하는 산들, 미켈레는 아픈 게 아니라며 자신이 곁에 두고 아들의 삶을 살게 해주겠다고 고집하는 이자벨라. 엄마와 동생의 팽팽한 대립을 영문도 모른 채 지켜보며 실수를 연발하는 미켈레, 계속해서 몰아치는 사건들. 과연 이들은 오해와 갈등을 극복하고 진정한 ‘앙상블’을 이뤄 낼 수 있을까?
연극 <앙상블>은 2015년 아비뇽 오프 페스티벌에서 초연되었으며, 당시 관객과 평단의 열렬한 성원과 지지에 힘입어 2017년에 파리에서 재공연되었다. 파리 공연 또한 대단한 성공을 거두면서 <앙상블>은 2017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연극상인 ‘몰리에르 상(Prix Molières)’의 민간 연극 부문 최우수 여자연기상과 신인 남자연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으며, 파비오 마라의 수상은 아쉽게 불발되었지만 극 중 어머니 역을 맡은 카트린 아르디티(Catherine Arditi)가 최우수 여자연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앙상블>은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체코, 폴란드 등의 나라에서 번역돼 공연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처음 이뤄지는 공연이다. 올해 여름에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관객과 다시 만난 바 있다.
극단 산울림 창단 50주년을 맞은 올해, 해외 번연극의 지평을 넓혀온 그간의 행보를 이어가며 현재 유럽에서 주목받는 젊은 작가 파비오 마라의 대표작 <앙상블>을 한국 초연으로 선보이고 있다. 이번 공연의 연출은 2008년에 무대에 올린 ‘방문자’ 이후 11년 만에 고향 같은 산울림으로 돌아온 심재찬 연출이 맡았다. 어머니 이자벨라 역은 ‘도둑들’, ‘부산행’, ‘신과 함께-죄와 벌’, ‘허스토리’ 등의 영화에 출연해 4편의 천만 영화에 출연하는 기록을 세우며 ‘천만 배우’에 등극한 예수정 배우가 맡았다. 아들 미켈레 역은 유승락 배우, 딸 산드라 역은 배보람 배우, 교사 클로디아 역은 한은주 배우가 맡아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진 인물들끼리의 앙상블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번역을 맡은 임수현 번역가는 ‘작품이 지닌 보편적 주제와 재미, 그리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매료되었다’고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작가 파비오 마라는 우리에게 ‘삶이란 교류를 통해, 함께 겪어낸 순간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라는 작품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긴밀한 관계 안에서 어떻게 그토록 금지된 영역이 생겨날 수 있는지, 정체성에 대한 가장 큰 문제들은 이러한 관계 안에서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그 관계들임을 잘 알기에 오히려 비밀과 침묵을 강요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며, 이렇게 만들어진 숨 막히는 가족 관계가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진실한 고백을 막아버린다고. 서로가 말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과 모순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어머니와 아들의 뗄 수 없는 관계는 이탈리아 출신 작가의 극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동서양을 떠나서 우리에게 사랑과 아이러니가 함께 하는 애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자벨라는 30년이 넘게 세상을 떠난 남편의 양복을 가지고 있다. 폭력적인 남편이지만 사랑하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에 그라는 사람은 그녀에게 '애증'의 존재일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양복에 대한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나태주 시인의 짧은 시 '이 가을에', '아직도 너를/사랑해서 슬프다'가 떠오른다는 예수정 배우는 삶이란게 화려함을 운운할 필요가 없다고. 미켈레에 대해 집착이라고도 보일 수 있는 사랑은 그저 미켈레가 손이 더 많이 가는 것 뿐이다고. 간단하다고, 인생은. 새 옷, 새 신발 그 정도면 행복한 거 아니냐며 화사한 웃음과 함께 진솔한 속마음을 전하였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중인 30대 중후반의 작가 파비오 마라는 한국적 정서의 부모관계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나 여겨질 정도로 가족간의 갈등에 대해 놀랄 정도로 세심하게 작품 속에 녹여내었다. 작가는 작품 속의 관계들에 대한 경험을 직접적으로 한 것은 아니며, 작품 속 캐릭터들은 관계들을 생각하며 써 내려가는 과정 속에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지 않은 상태로 어느 순간 만들어졌다 전하였다. 그리고 캐릭터의 성격 구상을 위해 어머니들을 가장 많이 인터뷰했다고 하였다. 한국의 관객들이 자신의 작품을 보며 눈물을 흘릴지는 몰랐다며, 관객들이 자신보다 훨씬 인간적이라는 느낌을 건네기도 하였다.
유승락 배우는 장애를 가진 미켈레를 연기를 하는 동안 그를 '희화화'되지 않도록 스스로 기준이나 레퍼런스를 만들도록 노력을 계속해서 기울였으며, 특별히 누군가를 모델로 삼지는 않았다 이야기하였다. 주변의 걱정과 여러 위험요소들이 많았지만, 5살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아픔과 상처를 겪으며 그 시간에 계속 머물러 있는 텍스트 속의 미켈레를 '나'라는 존재 안에서 몸동작, 말투를 찾으며 자기세뇌의 시간을 가졌고 며칠간 너무나 고생스러웠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더라도 작든 크든 마음의 병(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거나, 자신의 신체를 미워하거나)을 가지고 있기에, 오히려 미켈레는 눈에 보이는 장애를 가지고 있을진 몰라도 누구보다 마음이 넓고 큰 사람이라 느꼈다는 솔직한 심정을 조근조근 이야기해 나갔다.
산드라는 매우 짧은 시간에 어머니 그리고 자신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존재이다. 말로 전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믿음 속에서 소통의 부재들은 점점 커져 나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해'라는 짧은 말을 전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자신들의 감정 표현들은 사라져 가고 상처들은 곪아갈 뿐이다. 어렸을 때 생긴 마음의 생채기는 가려질 뿐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의 어루만짐으로 마음의 생채기는 어느 한 순간 급작스레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기에, 산드라와 이자벨라의 화해는 오히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클라우디아의 역할은 가족이 아닌 제 3자라는 점에서 조금은 중요하지 않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역할은 사실상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과는 제 3자이기에 오히려 가족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수 있는 부분들을 볼 수 있고 들어줄 수 있다. 떨어져서 보기에, 적당한 거리의 유지가 가능하기에 허심탄회하게 대화가 가능하고 가슴의 응어리들을 더 쉽게 풀어줄 수 있다. 따라서 클라우디란 역할은 연극을 끌어가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다. 또한 일종의 특수한 교육을 담당하며 이 안에서 인간의 보편적 관점으로 접근이 가능하기에 감동적인 부분까지 더할 수 있는 캐릭터이다.
한은주 배우는 클라우디라라는 캐릭터에 대해 작가가 작품의 의도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정상과 비정상은 이분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공존이 가능한 부분이라 여기며, 가치와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이야기했다. 함께 하고 있는 듯 보이는 '가족'이란 공동체 안에서 모든 이들이 각자 최선을 다하지만, 자신은 (직장에서조차 위아래 상관없이) 위로하기 위한 거짓말조차 절대로 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최선을 다해 듣고 답하고 전적으로 믿어주며 최선을 다해 도와주려는 존재라고 전했다. 돌보고 돌봄을 당하는 게 당연시되고 있는 '가족'에게서는 오히려 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존재, 온 몸을 불사르며 가족을 지키려는 엄마에게 '도와줄께요', '믿어주세요', '약속할께요'를 유일하게 건네는 존재라는 캐릭터에 대한 해석으로 관객들의 진심 가득한 박수 갈채를 받기도 했다.
작가 파비오 마라는 여러 나라에서 공연하며 미켈레의 웃음과 관객들의 웃음의 시간차를 많이 경험했다 이야기했다. 관객이 웃는 것은 미켈레의 상황을 희화화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해해서 웃는 것이었다. 무대 위 이자벨라에 심하게 감정적으로 동일시하며 심하게 울던 어머니들도 있었다. 기억나는 관객 중 하나는 아비뇽 공연에서 연극의 무대장치를 도와주시던 분이다. 그 분은 마지막 날 관객석에서 공연을 관람하면서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미켈레와 같은 장애를 가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동생을 만나러 길을 떠났다. 관객들에게서 느낀 이러한 감정들 모를두 마음에 담아 공연에 녹아내 표현하려 했기에, 동서양을 떠나 모든 관객들이 공연을 통해 감동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작품 속 낱말 맞추기에 나오는 질문들 그리고 공연의 제목 '앙상블'에 대한 답은 작가는 관객들에게 드리는 질문일 수도 있다고 한다. 정답은 없다. 그렇기에 공연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찾은 답은 모두가 맞다, 틀린 건 처음부터 없음이다.
속도감 있고 절제되고 현실적인 대사들과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의 장면들을 통해 무대 위에 생동감을 더하고, 우리를 돌아보며 인물들에게 더 깊이 공감하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연극 <앙상블>은 웃다보면 어느새 울게 된다.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바로 우리 모두의 이야기에 누구나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는 아름다운 공연은 다음 주 주말까지 관객들과 만남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