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 작가의 실제 가족사를 바탕으로 기억 속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작품 <알리바이 연대기>가 5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2013년 초연 출연진들이 다시 뭉친 수작의 귀환 <알리바이 연대기>는 지난 16일부터 11월 10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당대를 살아낸 또 다른 아버지 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을 소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을 선사하고 있다.
“2013년 12월 29일. 오늘 나는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제 이름은 ‘재엽’입니다.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를 쓰고 연출한 김재엽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저와 형 그리고 아버지, 그러니까 1930년 일본국 대판시(현 오사카) 동성구 대금리점 556번지에서 태어난 故김태용 님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오래 전 신병 훈련소 앞에서 저를 기다리던 아버지의 눈물이 떠오릅니다.
이상하게도 그날 아버지의 눈물을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눈물을 이해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버지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 하나의 알리바이를 알려주셨습니다.
흐려진 진실과 폭격의 굉음이 더 익숙한 세상을 살아온 아버지.
언젠가 인생의 알리바이를 고백할 순간이 찾아온다면 저도 아버지처럼 용기를 낼 수 있을까요.
<알리바이 연대기>는 작·연출을 맡은 김재엽 본인과 그의 가족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진행된다. 서울과 대구, 오사카를 오가는 160분 동안 관객은 영어교사로 평화롭게 퇴직한 아버지가 걸어온 뜻밖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된다. 동시에 개인의 역사 안에서 불가분하게 흘러가는 국가의 역사를 맞닥뜨린다. 일제강점기와 이후 대통령 9명의 시대를 지나온 아버지는 한국 정치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이상을 갖고 저항하지도, 현실에 완전히 적응하지도 않은 채 살아가는 ‘가운데의 삶’을 선택한다. <알리바이 연대기>는 역사책에서 도드라지던 극단적인 인물들 대신, 언제나 이방인의 경계에 있고자 했던 한 지극히 평범한 개인의 번민에 주목한다. 한 편의 희곡에 개인과 사회의 역사를 얽어내는 과정에서, 작가는 딱딱한 사실의 나열보다는 잔잔한 웃음을 택했다. 작·연출 본인이기도 한 극 중 인물 ‘재엽’은 내레이터로서 관객들의 길잡이가 된다. 재치 있게 써내려간 한 가족의 이야기 속에 우리 현대사의 뒤엉킨 실타래는 한 올 한 올 풀어진다.
2013년 초연 당시 동아연극상, 대한민국연극상 등 국내 연극상을 휩쓸며 관객과 평단을 모두 사로잡은 <알리바이 연대기>는 김재엽 작ㆍ연출이 기억 속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고백보다 은혜가 쉬웠던 세상을 살아낸 한 인물의 가장 사적인 연대기에 비친 대한민국 현대사의 연대기를 짚어내며 연극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가운데의 삶’을 택한, 풍랑에 시대에 갈등하던 가장으로서의 모습과 지난한 세월을 거쳐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는 모습까지 아버지 ‘태용’의 일생을 부드러운 노신사 남명렬 배우의 진솔한 연기로 호소력 있게 담아냈다.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이끌며 공감대를 만들어나가는 ‘재엽’역의 정원조 배우, 방황하던 지식인 형 ‘재진’역의 이종무 배우와 실제 나이를 한참 거슬러 모든 아역을 도맡으며 작품에 재미를 더하는 지춘성 배우, 홍일점으로 다정다감하고 정 많은 우리네 어머니를 보여주는 전국향 배우 등 탄탄한 내공을 자랑하는 표정 하나, 주름 하나까지 연기로 승화시키는 출연진들이 그대로 돌아와 초연보다 더욱 진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초연 당시 소극장 판에서 시작된 <알리바이 연대기>는 백성희장민호극장을 거쳐, 2019년 명동예술극장에서 더 많은 관객과 만난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경북대와 주인공의 대구 집 등은 극장에 맞게 더 커진 스케일로 구현된다. 거대한 무대와 그 앞에 선 배우들이 이루는 미장센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기존 공연에서 엇갈려 지나가던 부자父子의 자전거에 이어, 세발자전거가 새로운 소품으로 등장해 미래 세대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제시한다. 무대 위 영상으로 구현되는 1960~70년대 풍경 역시 <알리바이 연대기>를 보는 또 하나의 묘미다. 국립현대미술관 2018 ‘올해의 작가상’에 선정된 화가 정재호가 그린 근대도시의 풍경과 건축물들이 영상으로 등장해 급속도의 경제성장을 지나온 우리 현대사를 더욱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작·연출의 김재엽은 오랜만에 무대에 오르는 이번 공연에 대해 “아버지가 되고 나니 아버지의 이야기가 새롭게 보인다”며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보편적인 현대사, 보편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2013년 초연의 멤버들은 초연 때 작업을 위해 만들었던 단체대화방에서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통 작업이 마무리 되면 단체방이 없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알리바이 연대기>는 2013년 당시에는 이러한 형식의 희곡을 접해 보지 못했었기에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조율을 거쳐야만 했다. 그러했기에 그런 과정 속의 동료들과는 끈끈해질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멋지게 나이 들어가시는 남명렬 배우는 "긴 시간 연락하지 않아도, 몇 달만이나 1년 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듯 행복하게 만나는 사이"라며 초연 멤버들과의 끈끈한 정을 강조했다. 정원조 배우는 "5년이 지나며 자칫 잘못하면 너무 나이 먹게 나올까 걱정도 했지만 다들 괜한 걱정이었다. 관객들이 다시 만나는 이 연극을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전하는 말에, 남명렬 배우는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얼굴(액면가)은 다들 그대로이다. 그런데 첫 블러킹 작업에서 쪼그려 앉아 일어나는 장면에서 두 아들이 모두 '에구구' 탄성을 질러서 '아들, 무릎 괜찮냐?'고 하던 기억이 있다"며 재미난 에피소드도 전해 주었다. 김재엽 연출은 "일본 추리 장르, 탐정물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알리바이'라는 단어를 입에 자주 올리셨었다. '알리바이'라는 단어는 병상에서 들은 이야기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시작할 때부터 99.9% 서사적 다큐로 가려는 의지가 있었다. 작품을 쓰기 위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기장을 살폈고 어머니와 형을 인터뷰하고 가족들의 자료들을 모두 리서치했다. 작품을 써 내려간 뒤에는 형님과 어머님께 감수를 받고 잘못 알았던 부분들을 수정하기도 했다"라고 전하며, "실제와 크게 다른 점은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들을 위해 저보다(그리고 실제 우리집보다) 훨씬 멋있고 잘 생긴 배우님들이 서사적 다큐로 이뤄진 극을 이끌어 간다는 점이다"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2002년 신춘문예 당선을 시작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극작가 겸 연출가. ‘혜화동 1번지’의 4기 동인으로 기반을 다져온 김재엽은 '알라바이 연대기'와 '병동소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와 같은 다큐멘터리극 뿐 아니라 '배수의 고도'처럼 드라마가 강한 작품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현재 극단 ‘드림플레이 테제21’의 예술감독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알리바이 연대기>는 할아버지의 역사는 아버지에게로, 그리고 그 역사는 다시 아들에게서 손자에게로 흘러간다는 세상의 이치를 제시한다. 연출가 김재엽은 “이전 세대를 무대 위에 오롯이 불러냄으로써,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싶다”고 전했다. 작품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당신의 알리바이는 무엇인지, 그리하여 지금의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