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 ‘기억’, ‘시간’, ‘고통’, ‘속죄’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을 시도하는 연극, SF적이면서도 한국 사회에 대한 날선 비판과 동시에 서정적인 면까지 담은 작품 <그믐, 또는 당신의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지난 9일부터 27일까지 남산예술센터에서 관객의 평단의 찬사에 힘입어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라 초연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모자란 부분을 채우고 넘치는 부분은 덜어내며 한껏 자라난 모습으로 관객들과 마주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고등학교 때 연인사이였다.
남자는 동급생 살인죄로 복역하고 15년 만에 출소한다.
남자는 ‘우주알 이야기’라는 소설을 써서 여자가 일하는 출판사에 보낸다.
여자는 소설 내용이 자신들의 이야기인 것을 알고 남자를 찾는다.
남자는 자신의 살인이 세상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깨달아 간다.
남자는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릴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이번 연극은 제20회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한 장강명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비인간적인 것은 도구였던 것 같고, 인간적인 얘기를 하고 싶었다. 시간보다는 사람의 특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야기하던 장강명 작가의 반응 뿐 아니라 관객의 반응이 좋았던 극이기도 하다. 2018년 9월 남산예술센터에서 초연한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추상적인 소설의 내용이 신체행동 연극을 주로 펼치는 극단 동의 장점과 잘 결합된 작품”이라는 평과 함께 제55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수상, 평론가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3 선정, 한국연극 공연 베스트7 선정 등 2018년 연극계의 주요 상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소설은 일반적인 시간 법칙을 뒤집으며 전개된다. 연극은 원작의 순서를 한 번 더 흐트러뜨렸다가 극단 동의 방식으로 다시 묶었다.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순으로 단 한 번만 경험할 수 있는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은 전복되어져 남자, 여자, 아주머니 세 인물의 서사는 작두로 잘라냈다가 뒤죽박죽 이어 붙인 책처럼 과거ㆍ현재ㆍ미래가 뒤얽힌 채로 전개된다. 조각난 이야기와 사건들은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부유하지만 관객들에게 이것이 모두 한 사람, 남자의 인생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남자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나열하고 때로는 상상한 것을 더하고, 또 여러 관점에서 사건을 재구성한다. 남자는 현재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다시 해석하고 새롭게 만들면서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나가려 한다. 그믐 날 자신에게 들어온 ‘우주알’을 받아들인 남자는 과거부터 미래까지 동시에 볼 수 있게 되면서 시간을 한 방향으로만 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 고통을 어루만진다. 시간의 해체라는 외형적인 형식과 신체 행동 연극이라는 극단 동의 작업방식이 만나 관객은 과거로부터 쌓여 온 결과론적인 현재가 아닌, 언제인지 알 수 없는 현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풍부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인물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극단 동은 과거로부터 쌓여 온 현재가 아니라 언제인지 알 수 없이 ‘계속되는 현재’를 무대에서 표현하기 위해 극단의 연기 메소드인 ‘신체행동연기’를 작품에 집약시켰다. ‘신체행동연기’란 감정이나 심리의 표현보다 행동의 나열을 통해 인물과 장면을 전달하는 연기 방법론이다. 시간의 해체라는 원작 소설의 형식과 신체행동연기라는 연극 양식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의 미학적인 특징으로는 기울어진 원형 무대를 꼽는다. 원형의 무대 위에서 저마다의 세계를 표현하는 배우들은 균형이 무너진 채로 끊임없이 돌고 도는 몸짓을 만든다. 이는 과거에 대한 기억, 기억에서 비롯된 고통과 분노, 현재에 대한 위로를 의미하는 것이다. 강량원 연출가는 “소설을 읽었다면 책과 연극을 비교하는 재미를, 읽지 않았다면 공연을 통해 작품을 알아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며, 작품의 대사인 ‘과거로부터 널 지켜줄게’를 인용하며 “이 작품이 기억으로부터 받는 고통을 덜어주는 공연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억 또한 보정된 사진 같아서 사실 그 자체보다 편집과 자기애가 꾸덕꾸덕 뭉쳐 있다. 그래서 인생에서 무언가를 회상할 때는 ‘상처를 주었다’는 기억보다 ‘상처를 받았다’는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는 것 같다...기억 보정이란 게 이토록 위험하다.” - 정문정 저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작두로 제본을 잘라 페이지를 마구 섞어서 보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인생에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일는지 모른다. 기억은 객관적이지 않고 우리의 뇌는 기억을 작위적으로 조작할 수도 있다. 코끼리의 발만을 만져보고 보지도 못한 코끼리를 다 안다고 착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필요한 부분만을 빼고 날리고 미화시킨 기억을, 보정된 사진이 본인이라고 착각하듯 사실이라 여길는지도 모른다.
돌고, 털고, 반복되지만 패턴은 없는 행위들과 혼자 대화를 주고받는 행위는 시선을 잡아 끌지만 작품을 따라가는 데 아무런 불편함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옷차림에, 머리카락에, 손 끝 발 끝 하나까지 바라보게 만들어 준다. ‘대화’라는 것은 입에서 나오는 말로만 진위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거꾸로 반대로 말할 때도 있지만, 나의 몸과 눈은 반대를 전할 수 없다.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을 갈무리하며 온 몸으로 상대방과 세상과 대화함을 멈추지는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렵지는 않지만 생각할수록 쉽지만은 않다. 각자의 방식으로 상대방의 고통을 위로한다. 그들의 위로가 아프지만 눈물을 끌어내진 않는다. 그들의 덤덤한 위로의 방식이 다음번에는 어떤 식으로 전해 올지 궁금하다. 벌써 또 다른 방식으로 다듬어져 다시 돌아올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