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 소통의 단절이 익숙해지는 시대의 젊은 남녀가 조금씩 소통하는 법을 배워가면서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을 보여주는 연극 <열려가는 날>이 지난 23일부터 27일까지 소극장 혜화당에서 관객들에게 우리의 삶이 너무나 닫혀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고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취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경득은 집안의 기대와 잔소리에 못 견뎌 취직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작은 원룸으로 이사를 온다. 얼마 후 바로 옆집에 두 집 살림을 하는 중년남자의 애인인 젊고 예쁜 여자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추운 날 자신의 집 열쇠가 없어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경득은 잠시 들어와 있으라고 하면서 둘은 서로를 알아가게 된다.
작년 제3회 단단페스티벌에서 압도적으로 통쾌한 블랙코미디극을 보여주었던 고성일 연출과 뮤지컬창작소 불과얼음의 신작 <열려가는 날>은 일상을 훔쳐보는 것과 같은 사실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 ‘열려가는 순간’을 섬세하게 남아내며 단순히 서정성을 소비하기 위해 인물들을 예쁘게 포장하거나 자신들의 생각들을 숨기지 않으며 낯선 타인의 마음을 열어가는 풍경을 그려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예술적 완성도를 증명해야만 하는 단만극은 현장에 첫걸음을 내딛는 젊은 연극인에게도, 새로운 작품을 개발하려는 중견 연극인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연극이란 결국 제한된 시간 속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서 세계의 경계를 허물거나 확장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예술적 진보가 양적 증대가 아니라 깊이와 밀도에 있다면 단막극은 새로운 차원에서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연극적 과업일 것이다. 또한 단막극이 주는 제한된 시간은 관객에게는 다양한 세계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연극은 짧지만 영원할 것이다.(소극장 혜화당 프로그래머 김세환)
소통에 대한 진솔한 대화를 다룬 작품 <열려가는 날>의 희곡을 쓰고 연출한 고성일 연출은 최근 뮤지컬 ‘엄마의 약속(10.8~20, 시온아트홀)’과 ‘제4회 불과 얼음 단막 뮤지컬 페스티벌(10.8~13, 복합문화공간 에무)’을 연속으로 숨 가쁘게 3작품의 공연을 마쳤다. 그의 작품 세계를 관객들과 소통하며 계속해서 꿈을 이어가고 있는 그의 다음 행보도 기대해 본다.
- MINI INTERVIEW -
1. 최근 연달아 여러 작품을 하시는 모습 보기 좋고 반갑습니다. 뮤지컬이 그리고 연극 작품까지 연출님의 멋진 행보에 응원의 박수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작품은 24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된 극작 희곡작품이라 감회가 더 새로울 듯합니다. 신춘문예의 평처럼 엇갈린 입구와 엘리베이터는 영화 속 장면 전환의 느낌도 물씬 났습니다. 바뀐 결말 외에도 무대미술 등 무대화에 있어 특별히 신경 쓰신 점들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합니다.
초고의 결말은 명혜가 경득을 떠나고 경득은 그 허전한 마음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집들이를 하자고 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구원해주고도 또 취직이라는 새로운 설렘이 있음에도 외로움을 안고 살아야 하는 도시의 외로움을 표현하고자 했는데 신춘문예의 평에서 지적 받고는 희망적 결말로 바꾼 것이 이번 결말입니다. 무대미술에 대해서는, 작품의 배경은 작은 평수의 아파트인데 사실 실제로 제가 당시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하며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오피스텔에서 살면서 느낀 인상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단순한 선, 수직적 복도와 방 구조, 어색한 엘리베이터, 오피스텔이나 아파트의 현관과 문, 혼자 사는 집의 외로움 등이죠.
2. 남자의 대사 중 면접 때 받았던 질문, 구두와 여자의 공통점을 이야기 할 때 사실 조금 놀랐었습니다. 그리고 소위 썸을 타는 입장에서 굳이 저렇게 솔직할 필요가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었습니다.(수도검침원, 택배기사 대사도 세긴 했습니다)이번 무대화에서 조금 걱정이 되진 않았을지...그 대사들에 혹시 숨은 뜻이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고성일 연출 ▶ 그 대사는 사실 이 작품을 쓴 1995년 보다 조금 더 된 때에 전 저와 아는 어떤 분이 실제로 한 광고 회사 입사를 위한 면접 때 받은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엉뚱한 대답 역시 그 분이 했던 대답이었고요. 그 질문 외에 다른 질문들에 대해서도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한 그 분은 그 회사에 합격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질문과 대답이 실제로 오갔던 시절이었죠. 요즘 그런 질문과 답을 주고받으면 엄청난 비난을 들어야겠죠. 연습을 보고 저와 가깝게 지내는 동료가 그 대사 때문에 저를 걱정해주더군요. 요즘처럼 민감한 때에 그 대사는 좀 순화하거나 바꾸면 어쩠겠냐고 말이죠. 하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저는 그냥 쓰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지엽적 표현에 대한 평가가 두려워서 저 스스로 자기검열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경득과 명혜라는 캐릭터를 드러내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자님의 걱정 즉, 썸을 타는 입장에서 굳이 그렇게 솔직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경득은 계산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조금은 어리숙하고 나아가서는 솔직하고 순수한 사람입니다. 굳이 한 여성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의 실수를 숨기려고 하지는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아마도 이 작품에서 나오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졸부와 수도검침원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명혜의 반응도 명혜를 드러내는 방법이었습니다. 사실 거친 삶을 살아온 명혜에게는 경득과 같은 남자는 그 속이 뻔히 보이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아, 이 남자가 나한테 관심이 있구나... 다른 남자들처럼 또 뻔 하구나... 명혜는 성적 희롱을 직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룸살롱에서 일하는 여자입니다. 아마도 그런 성적인 농담을 수도 없이 들었겠죠. 그러면서도 웃음을 팔아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그것에 대해 민감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인물은 아닙니다. 그런 농담에 대해 화를 낼 사람이었으면 룸살롱에서 일 하는 직업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해 명혜가 크게 웃은 것은 그런 성적 농담에 익숙해서 그렇다기 보다는 경득이라는 사람이 그동안 자신이 겪은 남성들과는 다른 면이 있어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국 경득의 명혜에 대한 존중은 명혜 자신이 자신의 과거를 거부하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니까요.
3. 97년 IMF를 거치며 힘겨운 삶이지만 각자의 방법으로 지내온 두 사람과 그들 사이 한 남자와 수도검침원들의 대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유를 들려주세요.
∙고성일 연출 ▶ 졸부의 대사 중에서는 “신정 때 갔는데 뭘 또 가?”입니다. 명절 날 자기 본부인과 자녀들과 지냈는데 뭘 또 가냐는 말에서 당시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 중 그런 면을 보이는 사람들을 잘 드러내는 대사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수도검침원의 대사 중에서는 “남자끼리니까 하는 말입니다”도 그렇지만 “수도꼭지 안 세게 잘 잠가두세요”라는 대사입니다. 사실 이 또한 동성에 대한 성희롱일 수 있죠. 자신의 세계관이 다른 사람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것조차 무시하는 둔감한 인물을 드러내주는 대사인 듯합니다. 명혜의 대사 중에서는 “남한테 기대지 않는 것이구요”. 경득의 방에서 정전이 되어서 가느다란 초에 불을 붙여서 촛농을 이용해서 테이블에 초를 세우고 나서 하는 대사 중 맨 마지막 대사입니다. 명혜는 그 말을 하면서 홀로 설 결심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경득에게서조차 벗어나서 말이죠. 경득의 대사 중에서는 여러 개가 있는데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맨 마지막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역시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돼...” 이유는... 그래야 하니까요.
∙정우빈 배우 ▶ 한국사회에서 너무 당연하게 행해지던 남성 우월적인 문화가 담겨있는 대사 같았습니다. 처음엔 관객들에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 출발점으로 부터 많이 달라지지 못했기에 불편함으로서 다시금 경각심을 가지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최현돈 배우 ▶ 지역 특성인지 모르지만 어릴 적 주택에서 살 땐, 어디에 누가 사는지 거의 다 알고 지냈습니다. 그러다 아파트로 오니 앞집에조차 누가 사는지 모르게 되어버려 아쉽기도 하지만 사실 서로 너무 바쁘기에...경득이 대사처럼 문이 많을수록 외로움도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인사합니다.
∙곽단비 배우 ▶ 극 중 명혜라는 인물이 남에게 기대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경득이라는 인물을 통해 나 자신의 소중함과 가치를 다시 깨닫고 홀로서기를 결심한 명혜의 감정선을 볼 수 있는 중요한 대사라 생각합니다.
4. 연출님과 배우님들의 차기작이 궁금합니다.
∙고성일 연출 ▶ 차기작이요? 이번 작품도 1995년에 쓴 것이고 작년에 3회 단단페스티벌을 통해서 올린 작품도 2000년쯤에 쓴 작품이었습니다. 차기작 이라기보다는 이미 써두었는데 아직 공연되지 못한 여러 작품들 중 하나라도 공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책상 서랍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작품들을 제외한다면 당장은 지금 쓰고 있는 중국에서 공연될 뮤지컬 작품입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만한 것은 아니고요. 어떤 작품이 되었든 공연을 통해 관객을 만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우빈 배우 ▶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근 시일 내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최현돈 배우 ▶ 아직 없고 오디션준비중입니다!
∙곽단배 배우 ▶ 아직까진 정해진 차기작은 없지만 앞으로 연극이나 뮤지컬 통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10월 16일부터 11월 24일까지 소극장혜화당에서 50분이란 제한된 시간동안 예술적인 완성도를 증명하는 작업을 시도해보자는 취지로 시작된 단단페스티벌이 올해 4회를 맞았다. 매년 꾸준히 개최된 성과에 힘입어 올해는 높은 경쟁률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훌륭한 작품들이 다수 공모에 신청한 결과 페스티벌 기간을 대폭 확대하여 6주 간 예술적 진보에 있어 깊이와 밀도가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열정적인 창작자들이 활동할 무대를 제공하고 비상의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다.
매년 가을마다 소극장혜화당에서 열리는 단단페스티벌 50분 단편 듀엣전은 2회의 공연이 연속으로 공연된다. 2주차 공연을 마친 단단페스티벌은 3주차(10.30~11.3)는 레인보우 웍스의 ‘최후의 남자’와 극단 페로자의 ‘조용한 세상’, 4주차(11.6~10)는 극단 동네풍경의 ‘계단참에서 보는 풍경’과 극단아이리스와 슈퍼비 엔터테인먼트가 공동 제작한 ‘그녀들만 아는 공소시효’, 5주차(11.13~17)는 드림씨어터의 ‘사무실’과 스튜디오말리의 ‘지윤이언니 시집가는 날’, 6주차(11.20~24)는 뾰족한 상상뿔의 ‘이.야.기’와 극단 유혹의 ‘그들, 오늘 여기에’의 작품들을 선보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