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 익숙하면서 낯선, 층과 층 사이 공간인 계단참에서의 보통 사람들의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사랑 이야기를 보여주는 연극 <계단참에서 보는 풍경>이 제4회 단단페스티벌 참가작으로 지난 6일부터 10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혜화당에서 관객들에게 짧고 굵은 감동을 선사하며 막을 내렸다.
낡은 상가 건물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사이에 적은 공간, 찌그러진 황도캔 재떨이와 하늘로 난 작은 창문이 하나. 2층도 3층도 아닌 장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곳. 연극은 바로 이 ‘계단참’에서 펼쳐지는 사랑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다. 노래방 도우미 하연과 PC방 아르바이트 동채, 횟집 주방 보조 광수와 건물 계단 청소부 진숙, 그리고 신입사원 미정과 그녀가 짝사랑하는 선배 상호. 세 연인들은 초라하고 비루한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며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사랑 이야기를 만들ㄹ어 나간다.
SF연극제부터 미스터리스릴러전까지 소극장 혜화당의 다양한 페스티벌에서 개성 강한 색채를 보여주는 ‘극단 동네풍경’의 김규남 연출은 “불안한 인생살이, 각자가 짊어진 일상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버거운 하루, 이 삭막한 도시에서 우리는 오늘 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알아가고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러므로 견딘다“며 작품에 대해 이야기했다.
서울 도심의 먹자골목 유흥가 건물의 세 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추운 겨울 밤, 순수하고 따뜻한 사랑 이야기를 건네는 작품 <계단참에서 보는 풍경> 속의 ‘사랑’은 짠 내음이 난다. 복숭아 꽃 향기, 사과의 향기로운 내음이 풍기는 사랑 이야기들처럼 달콤하지만은 않지만, 그들의 속내에서는 비릿한 비내음 속 은은한 치자 향기가 느껴진다.
- MINI INTERVIEW -
1. 이번 작품은 너무나 짧은데도 여운이 참 긴 작품인 듯합니다. 연출님의 전작들처럼 실생활에서 본인의 경험이 많이 녹아들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스물세 살 때, 유흥가 건물에 있는 PC방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늘 손님이 만석이라 밤새 정신없이 일해야 했는데 유일하게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공간이 그 건물의 계단참이었습니다. 두 평도 안 되는 그 작고 초라한 공간에 각자의 삶을 짊어진 사람들이 모여서 말없이 담배 한 대씩 피고 사라지는 거예요. ‘참 흥미로운 곳이구나, 계단참이라는 곳이…’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계단참을 오르는데 계단참 구석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여자를 봤습니다. 같은 층, 노래방에 오가던 도우미 누나였던 거 같아요. 저는 조용히 담배를 태우고, 그 누나는 계속 울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참 이상하고 서글픈 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의 경험이 저에게 상당히 강렬하게 남아 있었나 봅니다. 십 년이 지나, 서른이 넘은 어느 가을에 문득 그 때 그 순간을 희곡으로 한 번 써 보자 해서 쓰인 작품이 ‘계단참에서 보는 풍경’입니다. 아마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내내 있었던 듯합니다. 쪼그려 앉아 울던 그 누나도, 한숨 섞인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계단참을 오가던 사람들도. 그리고 막연하게 불안하기만 했던 그 시절의 저도.
2. 작품 <계단참에서 보는 풍경>은 사랑 이야기이니만큼 각 배우들의 매력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며 귀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각 배우들에 맞춰서 희곡을 쓰신 듯 할 정도였는데요. 배우님들의 각 배역의 사랑에 대해 본인이 실제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떠했을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임다해 배우 (하연役)
만약 제가 ‘하연’의 상황이었다면 저 자신이 갖고 있는 사연과 공허함이 있었을 텐데, 직업 특성상 항상 웃고 ‘사랑해’라는 말을 하루 종일 달고 사는 하연의 상황은 저 뿐만이 아닌 이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공감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쁜 와중에 틈틈이 나와 창밖을 보며 앉아 휴식을 취하는 하연에게 계단참이라는 공간은 현재 자신의 상태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 공간에 동채라는 인물이 들어오면서 조금의 (어쩌면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겁이 났을 수도 두려웠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까요.
만약 저에게 하연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고민을 하겠지만 동채를 만나 볼 것 같습니다! 귀엽잖아요. 혹여나 행복한 순간이 짧게 끝나서 아프고 다치더라도 “그 순간이 있기에 우리는 견디며 살아간다”는 연출님의 말에 많은 공감을 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상처들로 다치고 힘든 상태에서 어쩌면 더 아픈 기억이 될 수도 있지만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전 그럼에도 계속 살아갈 테니까요.
∙ 이연준 배우 (동채役)
실제로 나이도 이름도 누구지도 모르는 사람을 이야기 몇 번 나누어봤다고 사랑하게 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동채도 늘 그런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일생에 한번 있을까말까 한 일이 지금 일어난 것이 아닐까요? 동채가 사랑고백을 하는 그 순간은 어쩌면 기적 같은 시간인지도 모르지요. 있을 수 없는 일들도 일어나게 만드는 그만큼 소중하고 아끼고 아껴뒀던 말들을, 백번의 기회가 있었다면 적어도 99번은 꺼내지 못했을 말을, 연극속의 그 순간에는 뱉어버린 겁니다. 후회할 것 같지는 않네요. 뱉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시간들을 소중히 생각하며 사랑하지 않을까요.
∙ 홍정연 배우 (진숙役)
저라면 사실 이렇게까지 되기 전에 딸을 데리고 멀리 도망갔을 것 같습니다. ‘나’라는 사람의 불행이 광수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갉아먹는 게 싫었을 것 같아요.
한편으론 광수와 함께하기에는 어린 딸이 광수의 존재와 이별을 동시에 받아들여야하기에... 어찌 보면 진숙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광수와 함께 하든, 함께 하지 않든 지간에 서로 다른 이별의 종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 너무 어려운 선택일 것 같습니다.
∙ 이두아 배우 (광수役)
그 겨울의 첫 눈을 바라보는, 진숙과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는 마지막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광수에게 그것은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순간을 담아두고자 하는 의미일 수 있겠죠. 항암치료를 통해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그 후의 이야기는 알 수 없지만 광수와 진숙은 서로에게 짧지만 따뜻한 선물 같은, 위로의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광수로 진숙을 만난다면 극 중의 그와 같이 행동할 수 있을 거라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느끼고 공감하기에 광수로서 숨 쉴 수 있었습니다.
∙ 이정은 배우 (미정役)
누군가를 오랫동안 짝사랑하면 오히려 고백하는 게 더 어려워지는 거 같습니다. 실제 저는 그 사람이 저에게 확신을 주지 않으면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면 그저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시기가 찾아오더라고요.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마음을 고백한 미정의 용기가 참 기특했습니다. 저였다면 더 오래 걸렸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하지 않았을 거 같기도 하네요.
유부녀를 사랑하는 상호가 답답하기도 하고 화도 나지만, 마음이라는 게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결국 솔직한 게 제일 중요한 거 같습니다. 그 솔직함 덕분에 상호와 미정도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참 어렵지만, 미정처럼 술의 힘을 빌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 않을까요?
∙ 인규식 배우 (상호役)
상호와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미정에게 갈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호를 연기하며 들었던 생각이지만 ‘내가 뭐라고…’라는 말이 미정을 빤히 보고 있으면 머릿속에 스치더라고요.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다가온 미정을 절대 놓치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이전의 관계에서는 상대방에게, 나에게, 다른 사람에게 모두 거짓말을 많이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정에게는 거짓 없이 하려고 노력을 할 테고요. 미정과 상호는 굉장히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늦더라도 꼭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3. 배우님들이 작품 속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사 그리고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 임다해 배우
하연이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을 단적으로 표현한 대사입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삶의 아이러니‘인거 같습니다.
∙ 이연준 배우
현재를 사는 누구나 공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다들 ‘사랑’합시다.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 홍정연 배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서로를 위해 쓰려는 두 사람의 마음이 부딪히는 순간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이 말을 내뱉기까지 진숙으로써 수많은 현실적인 고민이 있었겠죠?
∙ 이두아 배우
이 대사를 할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고향이라는 말은 언제나 따뜻하지만 작별은 늘 두렵고 아픕니다. 제 고향은 조치원입니다. 연말에는 꼭…
∙ 인규식 배우
짧은 대사지만, 어려운 대사라고 생각합니다. 상호, 본인이 미정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고백이 되는 대사니까요.
∙ 이정은 배우
상호의 마음을 확인한 미정이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먼저 용기내서 건네는 말입니다. ‘1분’이라는 단어가 항상 속상합니다. 10분도 아니고, 1시간도 아니고. 고작 1분이라니. 미정은 이 1분의 순간으로 또 얼마의 시간을 버틸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4. 연출님과 배우님들의 차기작을 알려주세요.
극단 동네풍경은 오는 1월에 ‘안산예술의전당’에서 청소년 극단 ‘고등어’ 친구들과 창작뮤지컬 한 편을 올릴 예정입니다. 저는 연출로 참여하고, 이번 작품에 함께한 배우들도 청소년 친구들과 함께 무대에 오를 계획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단순한 연극 상연을 위한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 연극인들의 열정과 연대를 담은 지속적 운동으로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소극장 혜화당의 제4회 단단페스티벌은 4주차의 공연을 마치고, 5주차(11.13~17) 드림씨어터의 ‘사무실’과 스튜디오말리의 ‘지윤이 언니 시집가는 날’, 6주차(11.20~24) 뾰족한 상상뿔의 ‘이.야.기.’와 극단유혹의 ‘그들, 오늘 여기에’의 작품들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