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 유한한 자원과 터전 위에서 인간들은 사상과 체제를 만들어 사회 그리고 국가라는 거대공동체를 굳건하게 유지해 오고 있다. 그리고 산업과 기술 등의 발달은 인간들을 자급자족 생산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자본과 노동 간 이익충돌이나 제도 미비에서 생겨나는 갈등문제는 나날이 첨예해지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몇 백 년이 지난 현대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과연 더 행복해졌을까? 조선시대 관청 소속 광대나 재인 또는 유랑예인집단이었던 사당패 등은 모두 사회적으로 가장 천시되었던 천인(賤人)에 속한 계급으로, 전국의 백성들부터 임금에게까지 사회고발부터 위로와 즐거움까지 선사하였지만 빈궁과 멸시의 대상이었다. 약자 중 가장 약자일 수도 있는 그 예술인들은 오히려 더 그렇기에 약자들을 한층 섬세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그려내며 그 고충과 슬픔을 위로하는 무대를 예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만들어 오고 있다.
가상의 조선시대 이야기를 담은 창작뮤지컬 “스웨그에이지 : 외쳐, 조선!”은 삶의 고단함과 역경을 시조에 담아 털어냈던 시대에 역모 사건으로 시조가 금지되면서 백성들은 자유와 행복마저 점점 잃어가는 모습을 그려냈다. 그러던 중 15년 만에 조선시조자랑이 개최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자 조직된 비밀시조단 ‘골빈당’을 필두로 한 백성들의 당당한 외침이 시작된다. 행복할 권리, 평등한 세상을 위한 용기 있는 백성들의 외침은 관객들에게 감동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고 있다.
양반들은 서민들이 ‘시조’를 알게 되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한다. 서민들을 길들여 그들의 목적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단순한’ 무력감이 아닌 ‘길들여진’ 무력감이 지속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부르조아적 취미'라 여겨지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 구조 속에서 크기만 다를 뿐 반복되는 인생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연극 “마트료시카”의 이야기 또한 신분제 시대였던 조선시대의 서민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경 작가와 구태환 연출의 신작으로 지난 2월 ‘2019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연극 부문’ 선정작으로 짧은 기간 막을 올렸던 이 연극은 인간의 삶과 행복을 위한 길이라 여겨왔던 과학기술이 광속으로 발전할수록 더욱 고립되고 불행으로 내몰리는 인간의 모습을 예리하게 꼬집었다.
모순되고 위험한 현실을 서커스 속 위험한 곡예사들로 은유한 이 연극에서 희생자는 노동자만이 아니다. 관리자 그리고 회사의 CEO까지도 누군가에는 '을'일 뿐이다. 일하지 못하고 돈을 벌지 못하는 자는 사회에서 '낙오자'라는 낙인은 돈을 많이 버는 직종만을 선호하는 것을 넘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까지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들고 있다.
빈곤은 ‘적절한 생활수준의 향유에 필요한 자원, 능력, 선택, 안전 권력, 기타 시민적・문화적・경제적・정치적・사회적 권리의 지속적인 박탈이나 만성적 박탈’이다. 가난과 빈곤은 역사적 배경, 생활양식, 신념체계가 빈곤을 느끼는 방식을 좌우하며 이에 따라서 빈곤에 맞서 싸우는 데 필요한 전략들을 결정한다.(UNESCO, 2009)
지금 대한민국은 문화향유의 빈곤 국가이다. 문화의 향유는 선택이 아닌 기본 권리임에도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행동의 목적이나 동기가 외부적 요인에 의함보다 내재적으로 갈수록 자기결정성이 높아지고, 스스로를 오롯이 존중할 수 있게 되는데 자기결정성의 기본 형성에 문화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문화를 향유할 재원 문제가 당장 오늘내일이 힘든 서민들에게는 심리적 압박감을 초래할 수 있는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예술가들 또한 내재적 이득에 효용을 더 두고 있음에도, 문화가 사치라 여기는 인식과 대접은 큰 스트레스일 수밖에 없다.
미래의 목표를 위해 현재의 활동을 희생하고 있는 이들은, 코로나 사태 이후 안정적인 수입을 영위하는 이들보다 불규칙한 수입원으로 생활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넛지적인 자극과 단기적이고 선별적인 구제방법은 지금의 힘든 상태조차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정책을 집행하는 이들은 수혜원들의 단 몇 달 후라도 겨냥한 미래지향적인 대책으로 앞이 보이고 있지 않는 이들이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도록 집중해야 할 것이다.
정부와 시민 간의 상하관계나 평등관계를 도외시한 채 코비드19의 희생자 수만을 비교하며 대한민국의 우위를 논하기보다는, 독일과 영국, 캐나다의 소상공인 대책과 문화계 대책에서 우리가 뻔히 예상함에도 대비하지 않고 떠안고 있는 시한폭탄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리고 공공기관들에서조차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든 서류들로 수혜원들이 스스로 '가난'을 입증해야 하는 지난한 싸움은 멈춰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