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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가장 '연극스러운' 연극, '인간이든 신이든'..
문화

우리 시대 가장 '연극스러운' 연극, '인간이든 신이든'

권애진 기자 marianne7005@gmail.com 입력 2021/05/17 03:17 수정 2021.05.17 14:03
"어느 날 갑자기 떠나는 사람은 없어요.
떠나는 것밖에는 길이 없기 때문에 떠난 거죠.“
"인간이든 신이든" 커튼콜 /ⓒAejin Kwoun
"인간이든 신이든" 커튼콜 (사진=Aejin Kwoun)

[서울=뉴스프리존] 권애진 기자= 길가메시의 여정과 닮아 있는 우리 모두의 여정을 담담히 이야기하는 연극 '인간이든 신이든'이 지난 4월 29일부터 5월 9일까지 선돌극장에서 우리 시대 가장 '연극스러운' 연극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여운을 남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아쉬운 막을 내렸다.

지속적으로 신화의 세계 속에서 사회적 사건들을 해석해 온 극작가 고연옥과 강렬한 몸의 언어를 탐구하며 거침없이 무대에 풀어내는 연출가 김정이 세 번째 다시 만난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어떠한 단어나 문장으로 쉬이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한 성찰을 우리에게 남기고는 떠났다.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_청년(김하람) “저 피나는 노력은 뭘 위한 걸까? 정말로 나를 찾기 위해서? 아님 실패한 인생이라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서?” /ⓒ김솔(보통현상)(/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_ 청년(김하람) “무서운 꿈을 꿨어...난 혼자 집에 있었지. 집인데도 편하지 않아, 어디에 앉아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 난 숨어 있는 걸까, 갇힌 걸까...” (사진=프로젝트 내친김에)

고연옥 작가의 '인간이든 신이든'의 시작은 IS 전사가 되기 위해 떠난 청년의 실화이다. 그리고 인류 최초의 신화, 신이 되려 한 불사를 꿈꾼 영웅 길가메시와 ‘죽음 진전의 꿈’이라는 신화적 도구를 사용해 아들의 꿈속으로 찾아온 한 여자의 긴 여정에 관해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_여자(강명주),오마르(이의령), 수나(김원정), 청년(김하람)_"거기선 그랬겠지. 마침내 나약한 패배자의 역사를 끝내고 불멸의 영혼을 가진 신의 전사로 태어난 거요." /ⓒ김솔(보통현상)(/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 여자(강명주), 오마르(이의령), 수나(김원정), 청년(김하람)_ "거기선 그랬겠지. 마침내 나약한 패배자의 역사를 끝내고 불멸의 영혼을 가진 신의 전사로 태어난 거요." (사진=프로젝트 내친김에)

이야기는 그 어떤 르포(reportage)보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래서 IS 대원이 되기 위해 집을 떠난 한 청년과 청년의 꿈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을 만나러 오는 둘의 여정은 어슴푸레 테러집단이라 규정하고 있던, 잘 알지 못하던 그들을 좀 더 객관적으로 만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 /ⓒ김솔(보통현상)(/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 여자를 안고 있는 라일라(이미숙)_ 손끝 하나하나까지 집중하게 만드는 몸짓과 아우라와 너무나 담담한 음성과 슬픈 웃음은 어느새 눈가에 눈물을 맺히게 만든다. "유프라테스...유프라테스...날 잊으려 애쓰지 마라. 물 위에 새긴 이름 하나일 뿐" 맑게 울리던 이미숙 배우의 노랫소리는 어둠 속 밝은 한 줄기 빛 같이만 느껴졌다. (사진=프로젝트 내친김에)

'인간이든 신이든'의 심리묘사는 내밀하며, 어느 누구의 이야기에 치우치지 않기에 다층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적거리지 않았다. 이혼 후 아이를 맡기고 오직 자신의 성공을 위해 평생을 달려왔지만, 아들을 찾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경의 이곳저곳을 헤매는 어머니,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한 인간’, ‘못난 자식’이 아닌 ‘위대한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전사’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난 청년 그리고 수나, 오마르, 시린, 아만다, 라일라, 무함마드, 이브라힘까지, 모두의 선택과 결정 그리고 그들의 여로에 하나하나 공감이 간다.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이브라힘(임영준)_"너희 나라에선 그냥 죽도록 일만 했을 뿐인데,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았지. 그 사람들 눈엔 언젠가 폭탄을 휘감고 있을 놈이니까. 백속에서부터 그렇게 태어난 놈. 이미 덫에 걸려 있는 놈. 집에 돌아오니까 정말 이 길밖에 없더라고."  /ⓒ김솔(보통현상)(/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 이브라힘(임영준)_ "너희 나라에선 그냥 죽도록 일만 했을 뿐인데,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았지. 그 사람들 눈엔 언젠가 폭탄을 휘감고 있을 놈이니까. 백속에서부터 그렇게 태어난 놈. 이미 덫에 걸려 있는 놈. 집에 돌아오니까 정말 이 길밖에 없더라고." (사진=프로젝트 내친김에)

'인간이든 신이든'은 그 어떤 연극보다 사실적이고 또한 그 어떤 연극보다 계산된 치밀함이 보인다. ‘절대악’을 자행하는 이들이 과연 모두가 ‘절대악’일까? 모성애는 신의 자비이기에 오롯이 인정받고 용서받아야 하는 것일까? 애쓰며 살아온 기성세대는 청년들에게 과연 무엇을 남겨주었는가? 수없이 많은 질문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 정답은 존재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_여자를 구해주게 된 남자(윤광희)는 딸을 만나러 이 곳까지 왔다. ”...지금은 그저 제 인생을 멈추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찾고 있습니다.“ /ⓒ김솔(보통현상)(/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_ 여자를 구해주게 된 남자(윤광희)는 딸을 만나러 이 곳까지 왔다. ”...지금은 그저 제 인생을 멈추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찾고 있습니다.“ (사진=프로젝트 내친김에)

여전히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이 연극이라 믿고 있다고 말하는 고연옥 작가는 관객들을 향해 "팬데믹 시대에서 막강했던 세계와 인간존재가 자연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지는 것을 목격하며, 절대선이라고 믿으며 달려갔던 현재를 멈추게 했다"며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다시 만나기 위해 준비해야 할 마음은 무엇인지, 말을 건네는 연극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_아만다(김유민)도 IS 대원이 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_"이건 비밀인데...우린 실패하기 위해 여기 왔어. 가장 처절하게 죽기 위해....우린 처음이 아니야. 이 세상의 문을 닫는 마지막 사람이야." /ⓒ김솔(보통현상)(/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 아만다(김유민)도 IS 대원이 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_"이건 비밀인데...우린 실패하기 위해 여기 왔어. 가장 처절하게 죽기 위해....우린 처음이 아니야. 이 세상의 문을 닫는 마지막 사람이야." (사진=프로젝트 내친김에)

김정 연출은 인물 한 명 한 명의 내면이 여실히 느껴지도록 강한 흡입력을 지닌 이번 작품을 무대화하며 “작품이 아들과 엄마의 꿈, 심지어 각자의 꿈이 교차하는 이야기라 실체 없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저를 발견했다"면서 "고연옥 작가님이 쓰신 작품은 강한 연극성을 지니고 있고, 이미 모든 인물 안에 신화적인 가능성이 존재함을 깨닫게 되어, 제가 기존에 하던 방식으로 작가님의 작품들을 양식적으로 풀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는 헤매던 시간이 재산이 되어 이번 작품은 의외로 쉽게 풀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또 김정 연출은 “물론 그 바탕에는 세상에서 이것밖에 없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캐릭터와 작품에 매달린 지독한 배우들이 있었다”며 함께 작품을 한 배우들에게 그 공을 돌렸다.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_여자(강명주)의 행보는 사랑일까?집착일까?자기만족일까?_”우린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살았어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나 하면서. 하나마나한 그런 말들...“ /ⓒ김솔(보통현상)(/제공=프로젝트 내친김에)
'인간이든 신이든' 공연사진, 여자(강명주)의 행보는 사랑일까? 집착일까? 자기만족일까?_ ”우린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살았어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나 하면서. 하나마나한 그런 말들...“ (사진=프로젝트 내친김에)

고연옥 희곡집 3의 마지막 편에 수록된 희곡 '인간이든 신이든'을 다시 읽어내려가다 보면, 무대 위 배우들이 읊조리듯 노래하듯 스타카토 음성으로 들려주던 대사들이 귓가에 다시 들려오는 것만 같다. 쉬이 작품에 대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기조차 조심스러워지는 작품 '인간이든 신이든'을 이 감동이 잦아들 때쯤에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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