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 ‘어두운 렌즈를 통해 밤을 그려내며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작가’라 칭송받는 토마스 H.쿡의 소설이 이준우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붉은 낙엽”으로 관객들의 연이은 호평 속에 아쉬운 막을 내렸다.
“붉은 낙엽”은 제42회 서울연극제 선정 작품으로 추리극과 심리극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매력을 한껏 살려 지난 5월 20일부터 29일까지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공연을 선보였다.
단풍이 짙게 물든 가을날, 균열이 생기지 않는 단단한 가정을 원했던 에릭과 그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라고 작품을 설명하는 이준우 연출은 ‘Red leaves’가 절정의 생명력을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 찬란한 죽음과도 같은 필연적인 낙화의 숙명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단풍잎에 미세하게 박힌 반점들처럼 조금씩 자라기 시작한 의심의 씨앗이 어떻게 이들의 삶 속에 퍼져나가는지 무대 위에서 펼쳐나갔다.
‘서정적 아름다움이 결합된 매혹적 이야기’들로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천재 작가’라 불리며 미국추리작가협회상, 앤서니 상, 배리상 수상에 빛나는 토머스 H.쿡의 장편추리소설 “붉은 낙엽”은 어느 평범한 가족에게 닥친 위기를 통해 불신과 오해, 불완전한 추리의 파괴적인 성질을 오롯이 보여주는 추리비극이다.
우란문화재단의 ‘우란이상(문화예술 인력육성 프로그램)’을 통해 추리극과 심리극이 절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원작 소설의 특징을 잘 담아내며 무대로 옮겨졌을 때 더 매력적일 수 있는 지점을 찾기 위한 기간을 거치며 트라이아웃 공연을 선보였던 첫 공연과 같은 라인은 유지하면서, 이번 공연에서는 의심의 실타래에 더 세밀하게 초점을 맞추었다. 아마 그러한 설정에서 이상일 감독의 ‘분노’라는 영화가 떠올려졌을는지 모르겠다.
무대를 함께 마주한 관객들이 우리의 믿음은 어떤 토대 위에 있는지,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면 좋겠다는 이준우 연출은 일상적인 대화들로 심리와 추리의 극적 긴장감을 전달하는 방법을 택했다. 가족을 의심하거나 그 경로를 따라가며 조금씩 새어 나오는 가족에 대한 아픈 기억들은 주변부 인물들에 대한 의심이 더해지며 강박증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 의심하는 '에릭'을 연기한 박완규 배우는 더할 나위 없이 작은 감정까지 놓치지 않고 디테일하게 소화하며, 이번 연극제에서 연기상을 받았다.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지미 역의 장석환 배우를 비롯해 모든 배우들의 표정, 몸짓 하나하나가 에릭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마음 속 의심과 불안의 씨앗을 깨우며 숨죽여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일상적인 이야기 속에서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관객들이 숨을 죽이고 집중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노련함으로 탄탄하게 안정감 가득한 연극을 선보이지만 무언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독보적인 매력을 지닌 이준우 연출은 이번 작품을 포함하여 오랜 기간 함께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김도영 작가와 1인극 다큐멘터리 형식의 연극을 준비 중이다.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준비 중인 이준우 연출의 다음 작품은 실제 배우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작가는 러시아 유학 시절 모스크바 국립극장에서 3년 간의 배우 제의를 거절하고, 한국행을 선택한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으로 러시아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그는 한국에서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나는 누구일지,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다음 작품을 무대에서 빠른 시일 내에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