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프리존] 권애진 기자= 연극 제목인 “블루테(Velouté)”는 부드러운 수프지만 그러한 질감을 얻기 위해서는 채소를 잘게 ‘갈아내고’, ‘으깨어’ 만들어야 한다. 본래 재료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게 된 수프처럼, 우리의 개성과 인간성은 으깨어지고 뒤섞여 자본주의 식탁 위에 올라 가혹한 품평을 거치며 소비되고 망각되고 있다. 이처럼 언뜻 고요해 보이는 우리들의 일상 이면에 뜨겁게 끓고 있는 정신적 학대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번 작품은 그래도 연극집단 반의 작품들 중 꽤 친절한 작품임은 분명하다.
지난 5일부터 15일까지 대학로 씨어터 쿰에서 펼쳐진 연극집단 반의 작품 “블루테”의 작가 빅토르 아임(Victor Haïm)은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고 유머로 세태를 꼬집는 현실 참여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굴욕’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으며 대부분 코믹하게 그려졌지만, 본질은 비극적이다. 사회와 권력의 모순과 폐해, 부조리를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문체로 비틀어 풍자하고 꼬집는 그의 희곡이 연극집단 반의 연출과 배우, 스태프들의 목소리로 한국의 관객들에게 처음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습지만 우스울 수만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괴롭혀 온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로, 누군가는 뉴스에 나오는 일부 사람들의 얘기로 치부할 수도 있다. 빅토르 아임의 “블루테”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물리적 학대 외에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정신적 학대가 너무 만연하고 우리는 일상화된 폭력에 무감각하다는 경고를 던진다. “블루테”의 인물을 통해 우리는 부조리한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이며, 때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게 만든다.
1996년 연극집단 반을 창단했던 현 경남도립극단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박장렬 예술감독은 극단의 제32회 정기공연인 이번 작품에 대해 직장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와 그를 면접하는 면접관 그리고 면접관 아내의 형식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면접이라는 소재로 다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연극집단 반은 누구나 좋아하는 연극을 만드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누구나 좋아할 수 없는 연극을 통해 (호불호가 심한) 연극의 순수성과 예술성을 드러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초연은 미완의 완성이다. 누구나 좋아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속에 불편한 진실과 형상을 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극들을 만드는 데 주저하지 말고 지치지 않기를 기원한다. 단원이자 멀리 떨어져 있는 동지로서 배우이자 대표인 김지은 배우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라며 이번 작품과 극단에 대한 무한한 응원의 마음을 드러냈다.
아래는 창단 25주년을 맞는 연극집단 반의 5대 대표이자 이번 작품에서 클로에 역을 맡아 관객들이 매력적으로 느끼게 만들어 준 김지은 대표와 짧은 인터뷰 내용이다.
연극집단 반에서 보여주는 공연들은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몽환적'이라 느껴집니다. 현실 세계와 조금 비껴있는 듯한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이는 연극집단 반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다른 색을 추구하고 싶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몽환적이라는 표현은 그간 박장렬 상임 연출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대표가 된 후 올린 작품들은 '반답지 않다', '친절해졌다' 등등의 얘기들을 듣고 있습니다. 조금은 더 가깝게 소통해 보려는 노력을 관객들이 이제 차차 받아들여 주시고 있다 여깁니다.
연극집단 반은 지속적으로 사회 전반적인 우리의 문제에 대해 말하고 얘기하는 작품을 올렸습니다. 그 본질은 인간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어떤 색깔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인간'을 탐구하여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를 통해 연극집단 반만이 할 수 있는 얘기들을 쉽고 재밌지는 않더라도 창작극이든, 외국작품이든 꾸준하게 올리려 합니다. 또한, 이를 통해 연극의 순수성과 예술성을 드러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본 연극집단 반의 작품 중 어찌보면 가장 친절한 뉘앙스를 지닌 작품인 듯합니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느끼게 하고 싶었던 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가장 중점을 둔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프랑스 작품 초연이다 보니 우리와 다른 정서와 문화를 관객들에게 이해되게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습니다. 작품 속 정신적 학대 부분은 이제 서서히 인식되고 대두되고 있는 우리 사회 관점에서 원작을 최대한 손상하지 않으면서, 관객들과 최대한 함께 하려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세 인물을 통해 부조리한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이자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느낄 씁쓸함을 관객들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배우들이 육체적일 뿐 아니라 심적으로도 에너지 소비가 상당했을 듯합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무엇이었나요?
이번 작품에서 면접관과 조나탕은 부조리하면서 기나긴 대사를 외우는 것 뿐 아니라, 그 대사를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에너지와 체력을 공연 기간(연습 기간을 포함하여) 유지하고 조절해야 하는 점이 이전 어떤 작품보다 힘들었습니다.
연극집단 반의 차기작 소식이 듣고 싶습니다.
올해 12월 극단 단원인 이가을 작/연출로 “개미굴” 작품을 선돌극장에서 극단 정기공연으로 올립니다. 이 작품은 세상의 모든 어른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아이들의 외침입니다. 아동학대라는 주제를 넘어서 폭력의 구조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번역가 김보경과 강민재 연출의 손길을 거쳐 세심하게 하나하나 계산된 듯 펼쳐진 작품 "블루테"는 무대 위 배우들의 대화와 몸짓뿐 아니라 조명과 음악, 영상 그리고 사이사이 생략들, 의상과 연기의 색깔까지 저마다 말을 건네는 듯하였다. 작품 속에서 생생히 살아 있던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였던 작품 “블루테”는 부조리극이자 블랙코미디였지만, 생략을 같이 메워간다는 느낌으로 관객들에게 매력적인 기억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