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 지난 4일부터 19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펼쳐진 “밑바닥에서”의 무대는 이제까지 만나 본 막심 고리끼를 더욱 친근하게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이번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중장기 창작지원을 통해 제작된 극단 백수광부 25주년 기념 공연으로 백수광부만의 힘 있고 무대를 꽉 채우는, 존재감 가득한 색채로 현대와 어우러지며 쉽지 않은 고전임에도 관객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왔다.
원작을 한 줄도 지우지 않고 현대어에 맞도록 새로 다듬은 전훈 번역가는 국내에서 ‘체홉 연극 1인자’로 손꼽히고 있으며, 희곡집 출판사 애플리즘과 함께 운영하는 체홉 학회를 통해 기반을 마련하여 대학로에서 체홉의 작품만 1년 내내 공연하는 전용관을 열고 있다. 그는 “90년대 말 초벌 번역 당시 이 희곡에 있는 비참한 삶들은 조만간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25년 만에 다시 보니 여전히도 우리의 삶은 유치하고 무겁습니다”라며 한국 정서에 맞도록 새로 번역한 작품 “밑바닥에서”을 보여주며 여전히 고전문학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코로나로 인간세(人間世) 멸망의 때가 다가왔다고 느껴지는 요즘 이번 작품을 연출한 이성열 연출은 “이 작품의 배경인 빈민 합숙소는 밑바닥 인생들의 막장 풍경이지만 어떻게 보면 노아의 방주처럼 마지막 구원의 희망선이기도 하다”라며 “어떻게든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 거짓 위로든, 사기든, 동정이든, 존경이든, 진실이든, 똥이든, 뭐든 닥치는 대로 손에 잡고...우린 이런 아우성들을 들려주고 싶다”라는 소망을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지배의 구조를 가리기 위해 피지배층끼리 분열을 조장해 지배층의 어두운 면을 은폐하는 점은 100년 전 희곡이 쓰였을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유’라는 프레임을 앞에 내세워 더욱 당당하지만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을 뿐일는지 모른다. 1%가 규정한 프레임을 왜 99%의 민중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퓰리처상을 2번이나 수상한 20세기 최정상의 전설적 언론인 윌터 리프만의 명저 “여론(Public opinion)”에서 사람들이 사는 실제 사회는 너무 크고 복잡하며, 순식간에 변하기 때문에, 그 개인이 사는 세계를 직접 경험해 파악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제 현실과는 다른 자신만의 가짜 환경 즉, 판타지를 구매한다. 더 직접적인 문제는 이 가짜 현실을 제작해 유통하는 여러 업체의 제작자는 매우 주관적이며 편향적이라는 데에 있다. 그래서 각기 다른 가짜 현실을 구매한 사람들은 같은 물리적 세계에 살면서도, 다르게 생각하고,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느낀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개인이 산 이러한 가짜 환경이 그 사람의 의식을 지배해 실제 세계에서 그에 따라 행동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지어진 현실(Constructed reality)’에 살고 있다. 루까가 사람들에게 지어낸 환상을 그려주는 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상 우리가 현실이라 믿고 있는 실재부터 환상일지 모르기에 그 선택은 자의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코리올라누스’, ‘장주네’, ‘콘센트-동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등의 연극 음악뿐 아니라 장영규 음악감독은 이날치 밴드의 베이시스트 겸 프로듀서로 영화와 연극 음악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영화 ‘곡성’으로 청룡영화상 음악상, ‘얼굴없는 미녀’로 춘사대상영화제 올해의 음악상을 수상한 장영규 음악감독과 싱어송라이터 김선이 함께 한 “밑바닥에서” 음악 작업은 우리에게 친숙한 멜로디와 러시아의 옛 음악의 변주로 100년 전의 희곡을 현대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낯섦을 덜어내 주었다.
극단 백수광부는 앞으로도 지금껏 그래왔듯 꾸준히 연극을 만들어가려 한다. 백수광부의 하동기 극단 대표는 “농사를 짓듯 꾸준하고 성실하게, 밥을 짓듯 정성스럽게, 튼튼하고 쉴만한 집을 집듯, 여기서 연극을 짓고 있겠습니다”라며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연극을 만들어내며 어려운 시기를 너끈히 이겨내 오고 있다. 그렇기에 관객들과 소통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극단 백수광부의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