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을 맞으며
지금은 4순절 기간이다. 세계교회는 예수의 부활절 이전 40일을 수난절로 지킨다. 한 순이 10일이기에 40일이면 사순이다. 그래서 사순절이라 한다. 신도들은 4순절 기간 동안은 절제하고 거룩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려 힘쓴다. 나쁜 습관을 버리고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함에 진보를 이루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한다.
4순절의 마지막 한 주간이 고난주간이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시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신 예수의 고난을 기리며 한 주간동안 예수께서 겪으신 고난에 동참하는 한 주간을 보낸다.
"자녀이면 곧 하나님의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로마서 8장 17절)
한국교회의 호황기는 1970년대와 80년대였다. 그 시절엔 교세가 급속히 늘어났다. 그런데 그런 호황기에 우리들 목사들이 잘못한 것이 있다.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복 받아 잘 사는 것을 강조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가르치지 못하였다.
부활의 새벽은 십자가의 밤의 고통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부활의 영광만을 강조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외면하였다. 십자가의 고통의 밤이 없이는 부활의 새벽이 올 수 없음에도 한국교회는 부활의 영광과 복 받아 잘 사는 것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 결과로 신도들의 신앙생활의 수준과 질이 떨어지고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된 성도들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능력을 상실케 되었다. 2016년의 고난주간에는 교회의 이런 모습을 회개하며 고쳐 나가는 주간으로 맞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동양에서 전해오는 격언 중에 "하늘은 인재를 내실 때에 그를 오랜 고난의 세월을 겪으며 그를 연단하여 일꾼으로 세운다."는 말이 있다. 성경에는 같은 의미의 말이 여러 번 되풀이 나온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이사야 48장 10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편 71절)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고난으로)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고난의) 채찍질하심이라 하셨으니 너희가 참음은 훈련을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리니 어찌 아버지가 (고난의) 훈련을 시키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브리서 12장 6~7절)
고난은 훈련이다.
첫째는 사람되게 하려는 훈련이요
둘째는 일꾼으로 세우려는 훈련이요
셋째는 맡은 사명을 잘 수행하는 능력을 기르려는 훈련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로 인정하시고 아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능히 감당케 하시기 위하여 고난 중에서 훈련을 시키신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깊이 성찰하여야 할 말씀들이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에는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의미가 있고 목표가 있다. 오랜 세월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도 그리던 땅인 가나안으로 바로 진입하지를 못하고 40년간 시나이 사막을 헤매다 드디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40년간이 그들에게는 훈련기간이었다. 애굽 땅에서 몸에 베인 종의 근성을 제하고 새 땅에서 새 역사를 창출하기에 적합한 백성의 자질을 기르는 훈련이었다.
한 민족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부모의 아들이었지만 애굽 왕궁에서 40년간을 공주의 양자로 있으면서 최고지도자 과정을 연수하던 모세는 돌연히 살인자가 되어 도피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애굽 왕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변방인 시내산기슭에서 40년간 처가살이를 하며 내공(內功)을 길렀다. 그가 80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셨다. 그 40년이 그에게는 훈련 기간이었다.
위대한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열렬한 율법수호자였던 바울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 위에서 예수를 만나고는 아라비아 사막으로 찾아들어 3년간 수련을 쌓은 끝에 전도자로 나설 수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30세에 사역을 시작하시던 때에 먼저 유대 사막으로 들어가시어 40일간을 금식하시며 특별수련을 쌓으신 후에 사역을 시작하셨다. 우리 한국인들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국민임은 이미 세계가 알아주는 미덕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면이 한가지 있다. 훈련되지 못한 국민들이란 약점이다.
훈련된 바탕이 취약하기에 정치도 경제도 심지어 교회들마저도 진정한 진보를 이루지 못한 채로 겉돌고만 있다. 분야마다 될 듯 하면서도 되어지지를 못하고 헛바퀴를 돌리고 있다. 그 이유의 첫 번째가 훈련되어 있지를 못한 점이다. 훈련은 고난을 거쳐 이루어진다. 마치 십자가의 어두운 밤을 지나 부활의 새벽이 오듯이 고난 중에서 체득(體得)한 훈련을 통하여 개인도 기업도 나라도 그리고 교회까지도 제 구실을 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장 10절)
고난주간을 보내며 1974년 겨울 내가 겪은 체험을 생각한다. 그때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을 반대한 일로 정치범이 되어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에는 모두가 격앙되어 있었다. 그 시절 중앙정보부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고문을 가했다.
나는 잘못 맞은 왼편 옆구리 쪽이 통증이 심하였다. 누워도 아프고 앉아도 아파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체중이 37kg까지 내려가고 자고 나면 목에서 핏덩이가 뱉어지곤 하였다. 그런 몸으로 벽에 기댄 채로 이마를 벽에 붙인 채로 성경을 읽었다.
성경 중에서 의인(義人)이 왜 고통을 당하는가? 하는 주제로 쓰여진 글인 욥기를 읽어 나갔다. 욥기 23장을 읽을 때다. 10절에 이르러 말씀이 내 마음에 깊이 부딪혀 왔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 말씀을 읽으며 묵상하는 중에 큰 위로가 임했다. 내가 지금 정치범으로 옥중에서 죽게 된 것을 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그런데 왜 가만히 계실까? 하나님이 이런 고난 중에서 나를 훈련시키셔서 99.9% 순금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훈련시키시려는 것이다. 이런 극심한 고난을 통하여 나로 하여금 앞으로 교회와 겨레에 유익한 일꾼으로 나를 훈련시키시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임하였다. 이런 확신에 이르게 되니 내가 겪는 고통이 무익한 고통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유익한 고통으로 받아들여져서 마음이 평안하여지고 고통을 견딜 힘이 솟아났다. 그 뒤로는 통증이 밀려오면 스스로 다짐하곤 하였다.
"지금 겪는 이 고통은 나를 성숙케 하고, 승화시켜 주는 하나님의 손길이야. 지금 이 고통을 극복하여 나가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는 거다."
이런 마음으로 참으며 기도하고 운동하고 말씀을 묵상하곤 하였다. 얼마 후 통증은 사라지고 건강이 날로 좋아져 지금까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내가 감당하여야 할 일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확신한다. 고난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한 훈련이다고.
고난주간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고난주간에 이어 부활절이 있기 때문이다. 고난주간의 핵심은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어두운 밤의 고난을 거쳐 부활의 새벽이 왔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 부활의 영광이 있을 수 없고 부활의 영광이 없이 십자가의 고난 역시 무의미하다.
기독교의 힘은 십자가의 고난과 부할의 영광이 합하여 이루어진다. 십자가의 밤과 부활의 새벽이 합하여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이룬다. 그리하여 부활의 새벽을 기다리며 크리스천들이 치르는 고난에는 의미가 있다.
첫째 고난은 훈련이다. (욥기 23장 10절)
둘째 고난은 축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로마서 8장 17절)
셋째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히브리서 12장 6절)
넷째 고난은 거룩함에 참여하게 한다. (히브리서 12장 10절)
다섯째 고난은 치유와 회복을 이룬다. (히브리서 12장 13절)
어떤 사람들은 고난에 지쳐 좌절하고 만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고난 중에서 훈련 받아 승리하게 된다. 크리스천들의 삶이 값진 것은 고난의 밤을 지나 승리의 새벽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밤을 지나 부활의 새벽을 맞이하기 때문이다.